
은행권은 '역대급 실적'을 내며 호황을 맞고 있다. '라이선스'를 받아 한정적 경쟁을 하는 은행은 이럴 때일수록 어려운 사람에게 대출을 내어주는 것이 의무이고 상생이다. 그런데 은행들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대출을 좀처럼 늘릴 생각을 안 한다.
은행의 탐욕 때문일까. 실상을 들여다보면 조금 다르다. 은행이 중심이 되고 있는 금융지주들은 작년부터 꾸준히 '밸류업' 압박을 받아왔다. 쉽게 말하면 기업가치를 높이자는 것인데, 그 핵심 중 하나가 보통주자본(CET1) 비율이다. 어려운 말 같지만 결국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은행이 망해나갔던 경험이 있는 한국의 금융당국이 자본을 최대한 확보해 위험에 대비하라고 하는 것이고, 은행 입장에선 이 CET1 비율을 높여 주주들에게 최대한 많이 환원해야 하는 숙제를 받아든 것이다.
CET1 비율은 위험가중자산(RWA)이 많으면 낮아진다. 연체 위험이 높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에게 대출을 많이 내어줄 때 그렇게 된다. 당국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CET1 비율 13% 전후 선을 사수해야 하는 금융지주들은 돈이 있어도 이 비율이 깨질까봐 어려운 사람들에게 대출을 내어주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작년 말부터 뚝뚝 떨어진 원화값은 CET1 관리에 어려움을 안겼다.
13%라는 숫자는 무엇을 말해줄까. 은행이 보유한 위험자산 투자금액에서 보통주로 조달한 자본의 비율이다. 이것이 13% 전후면 대략 안전하다는 뜻이다. 은행의 자본건전성이 꽤 좋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것이 금융이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숫자인가. 그렇지 않다. 경기가 어려울 때 때로는 숫자를 넘어서는 금융의 역할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박인혜 금융부 park.inhye@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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