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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현의 금융과 경제] 진정한 적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기술 혁신기 진짜 경쟁자는
타 산업군의 '룰 브레이커'
변화에 대응 늦으면 무너져
산업간 경계 사라져 갈수록
기술 연결 능력이 생존 좌우

  • 기사입력:2025.08.17 17:28:54
  • 최종수정:2025.08.17 17:2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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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기술 혁신의 시대에는 공통된 역설이 있다. 기업은 대개 눈앞의 경쟁자를 경계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무너뜨리는 존재는 전혀 다른 산업 영역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적'이다.

사진 필름의 제왕이었던 코닥은 디지털카메라의 핵심 기술을 가장 먼저 개발했지만 그 기술이 자사의 기존 비즈니스와 충돌할 것이라는 우려에 스스로 외면했다. 코닥을 위협한 건 후지필름이 아니라 스마트폰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였다. 사진을 찍고 인화하던 시대가 저물고, '사진을 공유하는' 시대가 조용히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키아 역시 마찬가지다. 휴대폰 점유율 세계 1위 기업이었지만, 스마트폰을 하드웨어 관점에서만 해석했다. 반면 애플은 소프트웨어와 플랫폼 중심으로 스마트폰을 재정의했고,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통해 생태계를 장악했다. 전혀 다른 문법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시장을 갈아엎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 생명공학, 양자컴퓨팅, 클린에너지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전하는 기술의 빅뱅 한가운데에 있다. 이른바 범용 기술이 서로 연결되고 중첩되면서 과거 산업의 경계는 무의미해지고, 기술은 특정 산업의 울타리를 넘나들며 '연결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애플은 더 이상 정보기술(IT) 기업이 아니다. 금융, 헬스케어, 심지어 자동차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아마존은 유통업체가 아니라 지금은 전 세계 클라우드 인프라스트럭처의 중심이다. 테슬라는 단순한 자동차 제조사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로 움직이는 에너지 플랫폼을 설계한 기업이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 AI 혁신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구글의 딥마인드나 오픈AI 같은 AI 연구소는 단순한 기술 기업이 아니다. 그들은 검색, 금융, 교육, 심지어 법률 자문까지 아우르며 기존의 모든 '지식 기반 산업'을 잠재적 경쟁 지형으로 만들고 있다. 산업 자체를 재구성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 시기에는 규모의 경제보다 범위의 경제가 더 중요해진다. 한 가지를 잘하는 것보다 여러 영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기업의 생존을 결정짓는다. 기술이 교차하고 융합되는 시대에는 경쟁력도 함께 섞이고 재구성된다. 이런 변화 속에서 진짜 위험한 경쟁자는 기존의 경쟁자가 아니라 아예 다른 산업의 규칙으로 움직이는 플레이어들이다. 그들은 때로는 너무 작아서 무시되고, 때로는 너무 달라서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산업의 중심을 통째로 바꿔버린다.

이러한 기술 혁신에 따른 경쟁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전통적 '경쟁'의 의미마저 퇴색시켜 버린다. 플랫폼 사업의 경우 네트워크 효과와 '록인 효과(lock-in effect)'를 통해 사용자와 공급자 모두를 자사 생태계에 묶어두는 '싱글호밍(single homing)' 전략이 확산됐다. 이는 이용자가 단일 플랫폼에만 머무르게 만들어 승자 독식 구조와 사실상 독점(monopoly), 수요독점(monopsony)을 유도한다. 이처럼 공고해진 독점 체제를 무너뜨리는 주체는 언제나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 기술 기반의 외부 도전자들이다.

많은 기업이 자신의 산업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혁신이 몰아칠 때 전략의 핵심은 '내가 속한 산업을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산업이 언제든 재정의(redefined)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는 데 있다. 기술 혁신기에는 눈에 보이는 경쟁자보다 보이지 않는 경쟁자, 즉 산업 바깥에서 '범위'를 무기로 들어오는 자들이 훨씬 더 위협적이다. 코닥이, 노키아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듯이 말이다. 진정한 적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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