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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이시바 일본총리의 쓸쓸한 퇴장

비자금 스캔들·선거 줄패배 …
1년만에 사퇴하며 눈시울 붉혀
자민당 포퓰리즘 정책엔 일침
韓日 관계에 미래지향적 행보
그의 마지막 유독 아쉬운 이유

  • 이승훈
  • 기사입력:2025.09.08 17:46:02
  • 최종수정:2025-09-08 19: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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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영화에서도 그렇고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7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떠난다'고 발표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뒷모습도 비슷했다. 50여 분간 진행된 기자회견 내내 그의 발언에는 쓸쓸함과 아쉬움이 묻어났다. 회견 도중 그는 딱 한 번 웃었다. 총리가 됐을 때 지역구인 돗토리현 사람들이 응원해줬다는 내용을 말할 때였다. 그러면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힌 채 잠시 말을 멈췄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이시바 총리가 등판하게 된 1년 전 일본 정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2023년 말 터진 비자금 스캔들로 집권 자민당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후원금으로 받은 돈을 회계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마치 쌈짓돈처럼 써 버렸으니 욕을 먹어도 할 말은 없었을 것이다. 국민의 불만은 커져 당시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지지율은 10%대까지 떨어졌다. 자민당으로서는 전례 없는 일이다. 야당에 정권을 내줄 수 있다는 위기감도 커졌다. 결국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는 임기 만료 후 재출마 선언을 포기했고, 이후 선거 과정을 통해 선택된 것이 이시바 총리다.

이시바 총리의 정치 인생을 보면 항상 '여당 내의 야당'이었다. 당을 한 번 탈당한 경험도 있고, 현직 총리와 대립각을 세운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당의 정책과 맞지 않을 경우 거침없는 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이끌던 내각에서 자민당의 가장 큰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이시바였다.

'소신 있는 정치인'으로 '이시바다움'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했던 이시바 총리의 앞에 놓인 것은 가시밭길이었다. 개혁을 외치는 국민의 목소리는 컸지만 그가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작았다. 파벌이 해체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의원들의 모임은 존재했고, 그를 도와주는 의원 없이 혼자서 개혁을 외칠 수는 없었다. 자민당 '킹 메이커'로 불리는 전직 총리들의 눈치도 봐야 했고, 무엇보다 '여소야대'가 되면서 모든 정책에 야당의 협조를 얻어야 했다.

뚜렷한 개혁의 모습은 없고 기존 자민당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시바 총리를 보면서 국민은 다시 등을 돌렸다. 물가는 오르고 살림살이는 팍팍한데 지도자마저 방향을 못 잡고 있으니 '이시바다움'을 기대했던 사람들의 실망감은 더욱 컸다.

특히 비자금을 받은 의원들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고, 연금·세금 같은 시급한 개혁 현안을 외면한 것도 국민의 눈 밖에 났다. 이는 올해 도쿄도 의회 의원 선거,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잇단 패배로 이어졌고 결국 이시바 총리 퇴진의 빌미가 됐다.

반면 자민당의 '내 편'만 챙기는 정책은 계속됐다. 개혁 대신 전 국민에게 물가 보조금 지급 같은 듣기에 달콤한 정책만 쏟아냈다. 자민당 지지층인 노년층이 반기는 얘기다. 또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정책 책임자는 이를 방관했다. 이 또한 주요 지지층인 농민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이시바 총리가 7일 기자회견 때 자민당의 '지금만 좋으면 된다'라든가 '자신만 좋으면 된다'라는 자세를 비난했을 정도다. 그는 자민당이 신뢰를 잃게 되면 일본 정치가 안이한 포퓰리즘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따끔한 일침을 남겼다.

이시바 총리는 역사 문제에서 전향적이고 한일 관계의 미래에 대한 생각도 많다. 재임 기간이 길었으면 'DJ·오부치 선언'을 잇는 새로운 한일 공동 선언이 나왔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그의 쓸쓸한 퇴장이 오래도록 아쉬울 것 같다.

[이승훈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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