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음을 전폐한 그의 시선 끝에는 글자 모양의 금속이 놓여 있습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낸 문자 모양의 금속을 보면서 그의 뺨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뜨겁게 달궈진 쇳물을 견딘 아름다운 글자가 주는 황홀경. 남자의 이름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유럽에서 최초로 가동식 금속활자(알파벳 단위로 만들어진 금속을 배치하는 인쇄 시스템)를 발명해낸 사나이였습니다.
금속활자는 혁명이었습니다. 더 이상 책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갈 필요가 없어져서였습니다. 활자에 잉크를 바르고 찍어낸다면 몇 장이든 만들 수 있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큰 부자가 될 생각에 미소만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도착한 건 '부'가 아니라 '소송장'이었습니다. 금속활자 인쇄기를 내놓으라는 요구였습니다. 청춘을 다 바쳐 혁신적 발명품을 만들었는데, 그 공을 탈취하겠다는 것이었지요. 구텐베르크의 소송전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대변혁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상인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유럽 전역에 인쇄 시스템이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지적혁명을 폭발한 계기였습니다. 그 역설을 탐색할 시간입니다.

1400년 독일 지방 도시 마인츠. 이곳 지역 귀족이자 직물 상인인 프리드리히 겐스플라이슈는 제법 큰돈을 번 지역 유지였습니다. 동네에서 제법 떵떵거리고 살았던 덕분에 조폐국장까지 오를 수 있었지요. 프리드리히는 불같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상인의 딸이던 엘제 비르긴이었습니다. 귀족과 서민의 결혼으로 호사가들의 입길에 올랐지만, 프리드리히는 개의치 않았지요. 명예 때문에 사랑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내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구텐베르크였습니다.
아버지 프리드리히는 구텐베르크의 영특함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하겠다고 결심한 배경이었습니다. 지역의 이름난 수도원에서 라틴어를 배웠을 정도였지요. 당시에 수도원은 최고의 교육기관이기도 했습니다.
명민한 구텐베르크에게 수도원의 모든 풍경은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산란하는 빛들, 성가대의 조화로운 합창, 수도사들이 하나하나 필사하는 성경들까지.
특히 어린 구텐베르크의 눈에 들어온 건 수도사들이 심혈을 다해 만드는 책들이었습니다. 마치 도를 구하듯 책에 집중하는 종교인들의 열정이 소년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었지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까지 책을 만드는 필경사들이 뿜어내는 경이로움을 소년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구텐베르크가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는 고향 마인츠를 떠났습니다.

스트라스부르는 구텐베르크가 새롭게 정착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금세공업에 종사하면서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경위로 금세공업에 종사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가장 돈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이곳에서 배운 기술은 그의 인생과 전 세계의 항로를 바꾸는 엔진이 되었습니다. 금을 세공하는 기술을 기반으로 금속활자 제작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당시까지 인쇄는 나무 활자만 찍어낼 수 있어 내구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금속으로 만든 글자를 조합하면 책을 찍어내는 데 훨씬 수월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가 고향 마인츠로 돌아옵니다. 믿을 만한 사업가에게 돈을 빌려 금속활자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구텐베르크에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선 남자. 요한 푸스트였습니다. 인쇄물을 향한 구텐베르크의 관심, 금을 만지는 기술의 탁월함을 알아봤기 때문이었습니다. 푸스트가 구텐베르크에게 거액을 베팅한 배경이었습니다. 4년의 기다림. 마침내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합니다. 푸스트도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푼도 못 건질 수 있는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황청도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사업가 푸스트는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구텐베르크가 약속한 날짜가 되어도 돈을 갚을 생각이 없어 보여서였습니다. 연락을 취해도 반응은 미적지근. 상환을 요구하는 편지는 함흥차사. 그가 얼마를 벌어들이는지도 결코 알 수 없었지요. 푸스트가 1456년 결국 마인츠 대주교 법정에 소송을 제기한 배경이었습니다. 구텐베르크로서는 금속활자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소송전에 휩싸이게 된 셈. 법원의 판단은 명료합니다. "구텐베르크는 원금과 이자를 합친 금액을 갚아야 한다."

"구텐베르크와 똑같은 것을 만들겠어."
푸스트는 타고난 상인이었습니다. 돈과 이자를 받고 끝날 그가 아니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담보로 잡았습니다. 그는 진짜 복수를 준비합니다. 구텐베르크의 조수 페터 쇠퍼를 꾀어 동업을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핵심 기술을 빼 오기 위해서였습니다.
푸스트는 쇠퍼에게 자기 딸과 혼인을 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산업스파이'와 같은 행위였지요. 사업은 일사천리였습니다. 이듬해 푸스트-쇠퍼 인쇄소에서 '마인츠 시편집'이 출판됩니다. 서양 역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낸 두 번째 작품이었습니다. 푸스트-쇠퍼 인쇄소는 후발주자인 만큼 한발 더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인쇄 잉크에 색을 도입하는가 하면, 인쇄 연도를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출판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작품을 따라잡기 위해서였습니다.
푸스트는 세계 시장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인 파리에 직접 지점을 내기로 결정합니다. 독일에서 인쇄된 출판물을 파리에 직접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사이 50권의 책이 팔려나갑니다.
푸스트가 유럽 진출을 구상할 때 구텐베르크는 마인츠에 머물렀습니다. 그에겐 명민한 상인감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발명가였지만 상인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푸스트가 세상을 떠난 뒤 동업자이자 사위인 쇠퍼는 출판업을 더욱 확장합니다. 그의 아들인 페터 쇠퍼 2세가 독일 전역과 이탈리아까지 진출했을 정도였습니다. 쇠퍼 가문을 유럽 출판업의 기반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푸스트는 남의 사업을 탐내는 탐욕가였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욕망은 유럽 인쇄 산업의 혁신을 불렀습니다.
금속활자가 부른 영향은 대단했습니다. 책의 대량생산으로 소수가 독점하던 지식이 이제 전 민중에게 날아갈 채비를 마쳤습니다. 더 많은 책은 더 많은 호기심을 부르고, 촉발된 지적 욕구는 더 많은 책을 낳았습니다. 지식의 선순환이었습니다. 금속활자의 기술이 오직 구텐베르크에게만 머물렀다면 유럽의 지적혁명을 불러올 인쇄 혁명의 시기는 더욱 늦춰졌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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