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화가 오간 친구 집은 신축 아파트 꼭대기층 펜트하우스였다. 부모님과 아이들까지 삼대가 한집에 사는 대형 평수. "윗집 없고 집이 넓으니 소음 갈등은 적겠다"며 부러워했더니 친구 부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랫집이 한 가구가 아니라 무려 세 집이라서 '쿵' 소리 한번 잘못 냈다간 인터폰이 '세 번' 울린다고 했다. 아뿔싸, 한강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너희 집도 낙원만은 아니었구나.
공교롭게도 최근 공개된 여름 영화들의 공통 주제가 '층간소음'이다. 윗집 층간소음으로 잠 못 드는 주인공 집이 되레 아랫집에 의해 소음의 진원지로 몰린다는 설정도 현실의 판박이다. 결백을 입증하지 못하면 내가 가해자가 된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이웃은 '친절한' 이웃이 아니라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이웃이란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던가.

근대 이후 인간은 스스로를 '보는 존재'로 규정했고 오감 가운데 시각을 최우선 감각으로 설정했다. 르네상스 회화의 원근법, 데카르트의 기하학적 세계관, 미셸 푸코의 파놉티콘은 전부 시각 중심주의의 산물이다. 문명은 명확히 보고 선명히 판단하는 것을 진보로 여겼으며, 진리는 보이는 것이지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시각의 우위 이면에서 청각은 자주 외면당했고,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뷰의 광활함과 차경은 시세 차익으로 제도화되지만 층간소음은 감내와 이해심의 영역으로 개인화된다. 이건 시각만 중시하고 청각은 외면했던 역사의 증거다. 한강뷰, RR(로열동 로열층) 뻥뷰엔 프리미엄이 붙어도 소음 유무와 프리미엄은 상관관계가 없지 않던가.
그러므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쟁을 치르는 현대인의 층간소음 갈등은 시각 중심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감각적 균열의 결과다. 타자는 동공이 아니라 고막을 통해 침투한다. 눈은 감으면 되지만 귀는 접히지도 않는다.
들리지 않아도 될 소리는 방치하고 정작 들어야 할 소리는 시끄럽다며 지워버리는 무감한 사회에서 타자는 소음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청각 또한 시각과 대등하게 여겨야 할 때다. 우리는 보는 존재임과 동시에 '듣기도 하는' 존재란 사실 말이다. 듣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소리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수용하는 윤리가 아닐는지.
보름간의 층간소음 소동은 해피엔딩으로 귀결됐다. 결국 윗집 초인종을 눌러 "혹여 인터폰에 언짢으셨을까 걱정돼 올라왔다"며 또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복숭아 몇 알에 경계가 풀려 대화해보니, 노부부라고 확신했던 윗집은 네댓 살 위 맞벌이였고 발망치의 진앙지는 사춘기 두 아이였다. 내려오는 길, 양손엔 옥수수 한 박스가 들려 있었다. 요즘도 소음은 종종 들리지만, 잠만 잘 잔다.
공포는 진동 그 자체가 아니라 오해에서 시작되는 건지도 모른다. 오해는 확신이 되고 확신은 혐오로, 혐오는 폭력과 그 폭력의 되갚음으로 연쇄된다. 그건 모두가 다른 층위의 감각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듣기도 하는 존재란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조금은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귀 기울여야 하는 건 천장과 벽 너머 진동이 아니라 진동에 깃든 타자의 삶 자체여야 한다.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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