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난영화의 시놉시스 같은 이 문장은 올 상반기 가장 '뜨거운' 예언으로 떠올랐다. 일본의 한 만화가가 꿈에서 본 내용을 줄줄이 엮어 낸 책. 예언은 그중 한 구절에서 시작됐다. 동일본 대지진과 코로나19 대유행의 발생 시기가 얼추 비슷하게 들어맞았다는 것은 예지몽에 신빙성을 한 스푼 더했다.
"7월에 일본 가도 괜찮은가요?" 누구도 가려운 곳을 속 시원히 긁어줄 수 없을 질문이 인터넷에 가득했다. 연안에서 심해 물고기가 잡혀도, 곤충들이 이상 창궐해도, 기이한 모양의 구름이 포착돼도 '예언의 전조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거스러미처럼 남은 반일 정서는 뜬소문을 더욱 부채질했다.
지난 3월 일본 정부는 난카이 해곡에서 규모 8~9에 달하는 강진이 30년 내로 일어날 확률이 80%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13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와 292조엔이 넘는 경제적 피해 추산은 아비규환이었던 동일본 대지진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세상에는 사람들 입 밖에 나돌며 갈수록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믿어지는 성질의 말들이 있는데, 근거 없는 소문이 대표적이다. 대지진과 관련한 일본 정부의 발표는 오히려 만화가의 예언을 공고히 하는 증거로 여겨졌다. 둘이 교묘하게 섞여 마치 7월 5일의 대지진은 예정된 사실처럼 보였다. 예언의 주인인 만화가는 뒤늦게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온 시선은 '예언의 날'로 향하는 시곗바늘로 집중됐다.
공포를 타고 번지는 예언에 짚어야 할 본질은 가려졌다. 우리로 치면 대지진이 한반도 지각에 미칠 영향이라든지, 수십만 명에 달하는 재일교포와 관광객의 안전 대책이라든지 하는 것들. 대지진이 닥칠 경우를 대비한 생산적인 논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대재앙이 예고된 날 일본에 있었다. 주변에서 일정을 조금 미루는 게 어떠냐며 만류했다. 혹시 그 날짜만 아니면 안심할 수 있는 건지 반문했다. 7월 5일, 도쿄에서 어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가 지났다. 미약한 땅 흔들림은 두어 번 정도 느꼈는데 숙소 옆 철도로 열차가 지나는 진동이었는지, 지진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의 과학 혁명이 '무지의 발견'으로부터 기원했다고 말한다. 세상의 이치를 절대자의 전언을 통해 따르던 인간이 '여전히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을 때, 이를 기점으로 과학과 합리성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날 선 사고를 통해 인간은 중세적 사고의 껍질을 벗었다. 흉흉한 예언이나 미신, 비과학이 사실인 양 세상에 떠돌 때 나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울며불며 전지전능한 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도태 인류의 모습을 떠올린다.
여전히 인간이 가진 과학기술이 갈 길은 멀고 무지의 깊이는 깊다. 지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소행성도, 한 치 앞의 지진도, 하다못해 내일의 호우조차 정확히 예견하지 못한다. 대재앙에 필적할 재해는 30년 후, 내일, 아니 잠시 후에 찾아올지 모른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누군가는 재난을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들이 남길 말이 '예언은 실재했다'가 아니라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왔지만, 준비된 최선의 방법으로 돌파했다'였으면 한다.
[한주형 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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