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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이 쩔쩔…그들은 그렇게 ‘슈퍼乙’이 됐다

‘갑’ SK하이닉스에 대든 ‘을’ 한미반도체

  • 명순영,김경민
  • 기사입력:2025.05.01 12:30:17
  • 최종수정:2025.05.01 12: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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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 SK하이닉스에 대든 ‘을’ 한미반도체

최근 한미반도체가 SK하이닉스 HBM 생산라인에 배치한 자사 유지보수(CS) 인력을 철수시켰다. 업계에서는 파격적인 일이다. 한미반도체는 수년간 SK하이닉스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장비를 공급해왔다. 소위 말해 SK하이닉스는 ‘갑(甲)’, 한미반도체는 ‘을(乙)’이다.

다만 다른 게 하나 있다. 한미반도체는 단순한 을이 아니다. SK하이닉스에 HBM 제조에 필수인 TC본더(열압착장비)를 독점 공급해왔다. HBM은 D램을 여러 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만드는데, D램에 열과 압력을 가해 고정하는 공정에 TC본더가 쓰인다. 한미반도체가 공급을 끊으면 당장 HBM 생산에 차질이 생긴다. 을은 을이로되, 힘이 있는 ‘슈퍼을’이다.

두 회사 간 8년 동맹이 흔들린 이유는 SK하이닉스의 공급망 다변화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싱가포르 ASMPT, 후발주자인 한화세미텍 등과의 계약으로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본격화했다.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은 특허 침해 의혹을 두고 법정 공방을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과 지난 3월 420억원 규모 TC본더 수주 계약을 체결하며 독점 지위가 깨지자 한미반도체 불만이 폭발했다. 한미반도체는 8년간 동결해온 TC본더 장비 가격을 28% 인상하고 무상으로 제공하던 CS 서비스 중단을 통보했다. SK하이닉스 이천공장에 파견했던 CS 엔지니어 전원을 철수시키는 초강수를 뒀다.

한미반도체가 ‘슈퍼을’로서 갑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배경에는 전 세계 TC본더 1위 기업으로서의 경쟁력이 깔려 있다. SK하이닉스가 아니더라도 한미반도체 기술을 원하는 회사가 많아서다.

업계에서는 한미반도체가 삼성전자와 다시 손잡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미반도체가 2011년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하며 양 사 관계는 사실상 10년 넘게 끊겼다. 최근 한미반도체가 삼성전자와 TC본더 등 주요 제품 납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져 양 사 협력 가능성에 시장 관심이 쏠렸다. 2023년 한미반도체 창업자인 곽노권 회장 별세 당시 삼성전자 임원들이 조문하며 양 사의 앙금은 해소됐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마이크론이나 중국 기업도 한미반도체에 ‘러브콜’을 보낸다. 마이크론은 지난 1월 싱가포르에 패키징 라인 착공에 들어갔다. 미국 아이다호와 일본 히로시마, 대만에도 HBM 생산설비를 준비 중이다. 마이크론은 올해 한 자릿수인 HBM 시장점유율을 D램 점유율(20~25%) 수준까지 끌어올릴 방침이다. 마이크론의 공격적인 투자는 TC본더 시장에도 영향을 줬다. 한미반도체는 지난해부터 마이크론에 TC본더를 납품했고, 최근 대량 수주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이크론은 지난 1월 싱가포르 공장 착공식에도 곽동신 한미반도체 회장을 초청했다.

HBM 생산에 속도를 내는 중국 기업 발주도 이어진다. 일부 중국 반도체 제조사는 HBM2 양산 체제를 갖추며 TC본더 수요가 늘어났다. 한미반도체의 1분기 해외 고객사 비중이 90%에 달한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이처럼 SK하이닉스보다 마이크론 등 다른 고객 장비 수주 비중을 더 늘릴 수 있는 상황이다. 한미반도체가 SK하이닉스에 매달리려고 하지 않는 이유다.

ASML 본사가 위치한 네덜란드 펠트호번에서 차세대 극자외선(EUV) 장비인 ‘하이 NA EUV’가 조립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ASML 본사가 위치한 네덜란드 펠트호번에서 차세대 극자외선(EUV) 장비인 ‘하이 NA EUV’가 조립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슈퍼을’ 대명사 ASML

네덜란드 방문인사 1순위 방문지

슈퍼을 기업은 글로벌 IT 업계에 특히 많다. 네덜란드 장비 업체 ASML은 글로벌 ‘슈퍼을’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은 물론 TSMC, 미국 인텔 등 전 세계 주요 반도체 업체들이 ASML 장비를 갈급해한다. ASML이 반도체 최첨단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의 유일한 생산 기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2나노 이하 초미세공정에 필요한 차세대 EUV 노광장비인 ‘하이 NA’를 인텔, 삼성전자, TSMC 등에 납품하며 경쟁력을 확보했다. 하이 NA 장비는 기존 장비에 비해 약 2배 비싸다. 증시에서도 ASML은 인정받는다. ASML은 유럽 증시에서 비만 치료제 ‘위고비’로 유명한 덴마크 제약사 노보노디스크에 이어 시가총액 2위다.

‘반도체 겨울론’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산업이 AI 등 사회 전반에서 주요 동력으로 성장하며 EUV 노광장비에 대한 수요도 증가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ASML은 오는 2030년까지 연매출을 최대 97조원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대만 TSMC는 AI 반도체 스타인 젠슨 황 엔비디아 CEO조차 쩔쩔매는 기업이다. TSMC는 시가총액 1조달러(약 1370조3000억원)를 넘기며 엔비디아에 이어 반도체 기업 중 두 번째로 ‘1조 클럽’에 오르기도 했다.

TSMC의 지난해 4분기 세계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67%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TSMC 시장점유율은 지난 2023년 4분기 61%에서 2024년 1분기와 2분기에 각각 62%와 64%로 점점 높아지는 추세다. 반면 삼성전자 시장점유율은 계속 하락세를 보인다. 2023년 4분기 14%를 기록하던 삼성전자 점유율은 작년 1분기와 2분기 13%, 3분기 12%로 하락세를 이어갔고, 4분기엔 11%까지 떨어졌다.

AI 반도체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엔비디아조차 TSMC 앞에서는 한 수 접는다는 평이다. 지난해 10월 엔비디아 최첨단 제품 ‘블랙웰’ 제품 결함을 둘러싸고 TSMC와 엔비디아의 갈등설이 불거지자 젠슨 황 CEO가 직접 나서 “블랙웰에 설계 결함이 있었고, 이는 100% 엔비디아 잘못”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도 소수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기업들이 ‘슈퍼을’ 지위를 누린다. 차량용 반도체는 대량 생산이 가능한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다품종 소량 생산 구조를 갖추고 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 종류는 수십 가지에 달해 전체 시장을 총망라하는 ‘절대강자’가 없다. 하지만 전동화와 자율주행 기술 발전 영향으로 차량용 반도체 수요는 계속 높아지는데, 공급은 부족하고 후발 기업 진입이 어렵다. 이런 이유로 독일 인피니언테크놀로지스는 전력 반도체에서, 네덜란드 NXP는 자율주행 반도체에서, 일본 르네사스는 자동차 전장 시스템을 제어하는 부품인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분야에서 막강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슈퍼을 기업 경쟁력 들여다보니

1.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 강조

TSMC, 경쟁사 우군 만들어 성장

TSMC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독보적인 슈퍼을 기업으로 도약한 데는 이유가 있다.

TSMC는 일찌감치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유지해왔다. 개방형 혁신 플랫폼을 통해 여러 기업을 우군으로 만들고 동맹을 결성, 파운드리 생태계를 키워왔다. TSMC는 2008년부터 반도체 기술 개발, 협업을 위해 개방형 협력 생태계인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Open Innovation Platform)’을 운영 중이다. 지난해 말 기준 설계자산(IP) 업체 39곳을 비롯해 설계자동화(EDA) 업체 16곳, 디자인하우스 업체 29곳 등이 참여한다.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을 운영한 덕분에 TSMC는 어느새 6만개 넘는 IP 포트폴리오를 확보했다. IP는 반도체 특정 기능을 회로로 구현한 설계 블록이다. IP 파트너들은 특정 IP를 개발해 팹리스(반도체 설계), 파운드리 기업에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는 구조다. IP-팹리스-파운드리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TSMC가 일종의 판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TSMC는 매년 하반기 미국, 중국, 일본, 대만, 이스라엘, 네덜란드 등 세계 주요국에서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 포럼’을 열고 주요 고객사가 신제품과 기술을 교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포럼에는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AMD, ARM을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대거 참여한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포럼에 참가해 엔비디아, TSMC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조했다. 경영 컨설팅 업체 롤랜드버거의 이수성 대표는 “TSMC는 일찌감치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든 뒤 사업 다각화로 힘을 빼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객사와의 관계를 탄탄히 다져온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진단했다.

2. 과감한 투자와 아웃소싱

또 다른 슈퍼을 기업에 부품 생산 맡겨

ASML이 슈퍼을 기업으로 안착한 비결로 과감한 아웃소싱 전략을 빼놓을 수 없다. 초정밀 광학과 레이저, 소프트웨어 등 다양한 첨단 기술이 융합된 노광 장비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 부품은 70여개 공급 업체에서 30만개를 제공받는다. ‘모든 걸 잘할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잘할 수 있는 협력 업체가 있다면 미련 없이 그들에게 맡긴다.

대표적인 기업이 독일 광학 기업 자이스다. ASML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인 EUV 장비를 독점 공급하는데, 이 장비에 들어가는 광학 시스템을 자이스가 독점 공급한다. EUV 장비 1대에 필요한 자이스 부품만 3만개가 넘는다. 자이스는 EUV 기술 관련 핵심 특허를 2000개 이상 보유해 ASML조차 쩔쩔매는 ASML의 ‘슈퍼을’ 기업 격이다.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도 성공 비결이다. TSMC는 매년 수조원을 R&D에 쏟아붓는다. 2022년 R&D 투자액은 54억4350만달러(약 6조7000억원)에 달했다.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TSMC의 R&D팀은 하루 24시간, 주 7일간 가동된다. 초과 근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스템 덕분에 바쁠 때는 R&D팀을 2교대로 돌린다. 대만은 주 40시간제를 채택했지만, 노사가 합의하면 하루 근무를 8시간에서 12시간까지 늘릴 수 있도록 했다. 유연한 근무제도가 기술 혁신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3. 토론 중심 수평적 기업문화

상사 지시 무작정 따르지 않아

ASML은 수평적 기업문화로 유명하다. 직급이 높다는 이유로 무작정 상사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엔지니어들은 직급에 관계가 없고 끊임없이 토론한다.

ASML의 핵심 가치도 이른바 ‘3C’인 도전(Challenge), 협력(Collaborate), 배려(Care)다. 직급이나 지위에 따라 일이 이뤄지지 않고 모두가 공유하는 미션을 실현해내는 일이 최우선 과제다. 자신의 업무에만 집중하고, 동료나 소속팀과 협력하지 않는 직원들은 더 낮은 보너스를 받는 것으로 유명하다.

네덜란드 기술 칼럼니스트인 마르크 헤잉크의 저서 ‘반도체 초격차’에 따르면 ASML은 직원 간 칭찬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인정도구(Recognition Tool)’라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까지 개발했다. 직원들이 가상세계에서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칭찬할 수 있다. 충분한 포인트를 모으면 온라인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50유로 또는 250유로 상당의 기프트카드를 받는다.

다양한 인재를 포용해 분석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ASML의 문화다. 자폐 스펙트럼이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등을 앓고 있는 직원 비율이 일반 기업보다 높은 편이다. 세부적인 기술 문제 해결에 장기간 집중해야 하는 업무가 자폐 스펙트럼과 잘 맞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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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슈퍼을’ 기업 육성한다지만

과도기 버티도록 과감한 지원 필요

정부도 부랴부랴 ‘슈퍼을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 육성에 나섰다. 기술·시장·투자 전문가로 구성된 ‘슈퍼을 R&D 추진위원회’에서 기업의 R&D, 성장 전략 로드맵을 평가해 대상 기업을 선정한다. 선정된 기업에는 선행 기술부터 상용화, 후속 기술까지 통합 지원한다. R&D 수행 과정에서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전담 프로젝트매니저(PM)를 통해 밀착 지원한다. 구체적으로 선행 기술(2년) → 상용화 기술(3년) → 후속 기술(2년) 등 7년간 통합 R&D를 지원하되 단계 평가에 따른 차등 지원 등 경쟁 강화를 유도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도 슈퍼을 기업이 여럿 탄생하려면 유연한 근무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소부장 기업에 대한 과감한 지원을 통해 ‘퍼스트 무버’ 기업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수성 대표는 “한국 기업들은 ‘패스트 팔로어’ 전략에만 능할 뿐 전에 없는 제품이나 사업 모델을 만드는 데 취약하다”며 “정부는 슈퍼을이 될 만한 기업이 시장에서 성공 가능성을 인정받아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때까지의 ‘브리지 기간(Bridge period)’, 즉 과도기를 버틸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순영 기자 myoung.soonyoung@mk.co.kr,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8호 (2025.05.07~2025.05.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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