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상필은 지난 2일 의정부 아일랜드캐슬에서 막을 내린 ’메디힐PBA챔피언십‘ 결승전에서 다비드 마르티네스(스페인)에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세트스코어 3:4(11:15, 15:8, 15:13, 4:15, 1:15, 15:0, 7:11)로 패해 아쉽게 준우승(상금 3400만원)에 머물렀다.
비록 정상 일보 직전에서 멈췄지만 엄상필은 32강부터 8강까지 3경기를 모두 역전승으로 따내는 경기력으로 당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PBA투어 출전때 입었던 옷차림으로 기자를 맞은 엄상필과 결승전 뒷얘기와 자신의 당구인생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PBA투어 첫 결승진출이다. 축하인사도 많이 받았겠다.
=정말 휴대폰이 난리났었다. 32강 진출하니 50통 가량 축하메시지가 왔고 매 라운드 올라갈 때마다 더 늘어 결승진출하니 100통 넘게 왔다. 하지만 준우승하니 다시 50통이 되더라. 하하. 축하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결승전때 경기장에 부모님이 오신걸로 알고 있다.
=준결승과 결승전 때 부모님과 형, 그리고 지인 20여 분이 경기장에 응원하러 왔다. 아내와 6살 아들은 늦은 시간이라 경기장에 오지는 못했다. 결승전 끝나고 부모님께서 “수고많았다. 정말 자랑스럽다”고 하셨다. 부모님께 당구로 자랑스럽다는 말을 들은 게 어머니한테는 처음이고 아버지한테는 17년만이다.

군대 전역 후 25살 때 당구장을 운영했는데 그해 TV로 중계되는 전국동호인대회에서 준우승했다. 당시 아버지랑 함께 경기장에 갔는데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해주시며 그때부터 당구선수 길을 응원해주셨다. 이후 이번 대회서 다시 축하를 받으니 감동적이더라.
▲당구선수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학창시절 때부터 당구치는 게 좋았고 나중에 당구장도 운영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당구선수라는 개념 자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당구를 좋아하긴 했지만 선수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28살 때 서울 강남에 내로라하는 실력파들이 모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직접 겨뤄보고 싶었고, 실력을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당구장 운영도 제대로 하지않고 강남에 가서 매일 당구시합을 했다. 그때 함께 경기한 선수들이 고 김경률 이충복 김형곤 선수다.
그때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가장 낮은 핸디를 받고 경기했다. 2년 정도 그렇게 실력을 쌓자 2년 후에는 내가 가장 높은 그룹에 속해 상대에게 핸디를 주고 경기하고 있었다. 하하.
실력이 많이 향상돼 자신감이 붙었는데 가깝게 지내던 (이)충복이 형이 선수 등록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2007년 서울연맹 선수로 등록했다.

▲이번 PBA5차투어도 준우승이다.
=준우승을 많이 했지만 그렇다고 '준우승 컴플렉스' '준우승 트라우마' 등은 없다. 성격이 낙천적이라 결승 무대에 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항상 즐겁다. 결승전만이 주는 긴장감과 주목도, 흥미진진함은 내가 더욱 즐겁게 당구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준우승을 많이 했어도 아쉽지 않다.

▲끝까지 경기를 뒤집을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한창 강남에서 당구칠 때 2시간만 자고 30시간 연속 당구를 치기도 했다. 그만큼 오랜 시간 당구를 쳐왔던 경험이 몸에 남아있는 게 큰 도움이 됐다. 또 낙천적인 성격이라 뒤지고 있어도 예민해 지지도 않고, 쫓기고 있다고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경기 중 샷을 할 때 상대 선수가 무엇을 해도 신경쓰지 않고 공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상대선수 스타일에 맞춰 공격과 수비를 조절한다든지 경기 상황에 대처가 빠른 편이다. 이런 점이 역전승을 자주 이끌지 않았을까 한다.
▲‘불사조 엄상필’ 외에 듣고싶은 별명이 있나.
=‘믿고보는 선수'라는 별명이 좋겠다. 득점도 중요하지만 팬들이 경기를 보며 ‘저 선수 경기 정말 재밌게 한다’ ‘엄상필 경기는 항상 재밌다. 또 보고싶다’라는 이미지를 갖고 싶다. 그렇기 위해 공 배치가 수월할 땐 인터벌을 짧게 해서 빠른 속도로 공격한다. 아울러 박진감 넘치고 보는 맛을 살리는 경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결승전에서 7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졌는데, 아쉬움이 클거 같은데.
=결승전에 대한 미련, 아쉬움은 전혀 없다. 하하. 앞서 말했던 대로 ‘불사조’ 등 별명은 기대치않았던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낼 때 나오지 않나. 그래서 그런 반응을 보며 ‘아 내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구나’ ‘어느순간 내가 잊혀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결승 진출은 엄상필이란 이름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싶다.
▲롤모델이 프레드릭 쿠드롱이라고 들었다.
=PBA투어에 훌륭한 선수들이 많지만 붙으면 ‘이길 수 있다’ 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쿠드롱과 붙는다면 모르겠다. 하하. 그만큼 쿠드롱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경기를 하는 선수다. 한결 같이 흔들림 없고 팔스윙 각도 등 내가 머릿 속으로 그린 이상적인 모습을 실제로 구현해내는 선수가 쿠드롱이다. 아직 쿠드롱과 경기해보지 못했는데 결승전서 쿠드롱과 경기해 그를 꺾고 우승한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 하하.
▲경기 중 샷하기 전 바지를 추켜올리는 모습을 자주 하던데.
=어렸을 때부터 생긴 버릇이다. 한창 당구를 배울 때 몸이 굉장히 말랐다. 배도 홀쭉해서 배에 힘을 주기 위해 바지를 추켜올리고 샷을 했다. 지금은 의식하는건 아니지만 집중하거나 경기가 잘 풀릴 때 신나서 그런 동작이 나오는 것 같다. 앞으로 제가 바지를 추켜올리면 선수들이 긴장해야할 것이다. 하하.
▲PBA투어를 택할 때 고민하지 않았나.
=30대 중반에 당구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다. 그만큼 선수생활에 집중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 지인들의 응원 덕에 힘을 낼 수 있었다. 프로투어 출범 소식에 당구선수라면 프로에 도전해야 한다는 마음에 PBA를 택했다. 고민하지 않았다. 5차투어까지 출전했고 결승전에 오르며 느낀 건 경기장 분위기, 운영 등 모든 면에서 프로답다는 것이다. 이번 결승전에 가족과 지인 20여 명이 왔는데, PBA측에서 먼저 인원을 파악해 좌석도 챙겨주더라. 선수를 배려해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다시 한번 감사하다.

▲올 시즌 각오와 목표는.
=많은 분들의 응원에 항상 힘을 받는다.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고 싶다. 매 투어 목표는 전 대회 그 이상 성적을 거두는 것이다. 준우승했으니 다음 투어는 당연히 우승이다. 또한 내년 2월 열리는 파이널무대에 진출하고, 더 나아가 결승 무대에 서고싶다. [dabinnett@mk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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