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빌리어드뉴스 MK빌리어드뉴스 로고

17일은 서울올림픽 개막 37주년…되돌아본‘그날’ [이종세의 스포츠 코너]

서울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가 바뀐 사연 일본언론의 손기정 보도에 임춘애로 교체 특종 노려‘엠바고’깬 요미우리 등 오보 망신

  • 이종세
  • 기사입력:2025.09.17 11:51:13
  • 최종수정:2025-09-17 11:52:14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서울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가 바뀐 사연
일본언론의 손기정 보도에 임춘애로 교체
특종 노려‘엠바고’깬 요미우리 등 오보 망신

오늘(17일)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37주년 기념일이다. 서울올림픽 기념 국민체육 진흥공단(이사장 하형주)은 이날을 기념, 올림픽파크텔에서 기념식을 개최했으며 한국체육학회(회장 최관용)는 지난 8월 사흘간 국내외 석학 8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국제스포츠과학 학술대회를 여는 등 크고 작은 행사를 열었다.

88 서울올림픽 개회식에는 당시 대통령 노태우와 전 대통령 윤보선, 최규하,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 등 정계의 거물들이 참석했다. 하지만 이날 행사의 최대 관심사는 누가 성화 봉송 최종 주자를 맡느냐였다.

1988년 9월17일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도입 주자인 손기정이 성화봉을 들고 트랙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서울올림픽기념국민체육진흥공단
1988년 9월17일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도입 주자인 손기정이 성화봉을 들고 트랙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서울올림픽기념국민체육진흥공단

1984년 LA 올림픽 등 역대 올림픽 역시 성화 봉송 최종 주자를 비밀에 부쳤다가 개회식 말미, 성화 입장 때 공개하는 ‘깜짝 쇼’를 벌여왔다. 서울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분위기로는 누가 봐도 최종 주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당시 76세)이 맡을 것으로 예상했다.

서울올림픽 업무를 총괄하는 박세직 올림픽 조직위원장은 당시 올림픽조직위 출입기자단에게 손기정의 성화 봉송 최종 주자 선정 사실을 개회식 당일까지 보도하지 말아 줄 것을 당부했고 기자단 역시 역대 올림픽 개회식 관행을 감안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개회식 나흘 전인 9월 13일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같은 계열의 도쿄신문이 손기정의 서울올림픽 개회식 성화 봉송 최종 주자 선정 사실을 특종인 양 보도했다. 석간 1면에 손기정이 잠실주경기장에서 연습하는 사진과 함께 머리기사로 게재한 것이다.

훗날 손기정은 관계자들에게 “12일 일본 기자가 전화로 성화 봉송 주자 예행연습을 언제 어디에서 하느냐고 물어와 13일 새벽 잠실주경기장에서 한다고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고 털어놓았다.

엠바고(Embargo·일정 기간까지 보도를 유예하거나 중단을 의미하는 언론 용어)가 걸려있는 사안을 일본의 특정 신문이 깨버렸으니 서울 주재 외신기자들은 물론 국내 언론도 발칵 뒤집혔다.

국내 언론이 박세직 올림픽 조직위원장에게 “엠바고를 성실히 지킨 언론사만 피해를 볼 수 있느냐”라고 항의했고, 난처해진 박 위원장은 상응하는 조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과는 개회식까지 나흘밖에 남지 않았지만, 성화 봉송 최종 주자의 교체로 이어졌다.

1988년 9월17일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인 임춘애가 성화대를 향해 달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1988년 9월17일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인 임춘애가 성화대를 향해 달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이때 등장한 히로인이 86아시안게임 여자육상 3관왕 임춘애(당시 19세)다. 도입 주자 손기정이 성화를 들고 잠실주경기장 남문에서 트랙을 따라 100m를 돈 다음 최종 주자 임춘애가 이를 받아 4백m를 뛰어 성화대 아래 대기하고 있는 3명의 점화자 가운데 하나인 정선만(전남 소흑산도 분교 교사)에게 성화봉을 넘기면 정선만이 김원탁(건국대 대학원)과 손미정(서울예고 3년)의 성화봉에 불씨를 옮겨 점화하도록 개회식 시나리오가 바뀐 것이다.

박세직은 그의 서울올림픽 회고록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에서 ‘개회식 전날(16일) 저녁 잠실주경기장 지하실 개폐회식 최종 점검 회의에서 당시 76세의 손 옹에게 “고령이어서 달리는 도중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선배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남자가 여자에게 성화를 넘겨줌으로써 고난의 역사를 딛고 번영을 이룬 한국을 세계에 알리기로 했으니 양해해달라”고 했다’라며 기술했다.

회고록은 이어 ‘손 옹은 실망의 빛을 보이는 듯했으나 “그렇게 결정했으면 따라야 하지요”라고 했다’며 적었다. 하지만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손 옹은 한 개폐회식 상임위원이 “오늘 밤은 댁에 기자들이 몰려올 가능성이 있으니, 여관에서 주무시지요”라고 한 말에 불편한 심기가 폭발, 격한 몸짓으로 울분을 토해 가까스로 수습했다’고 썼다.

이어 ‘혹시 손기정이 개회식 행사에 불참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김치곤 올림픽조직위 문화식전국장을 17일 새벽 손기정 자택에 보냈는데 방문 결과 손기정은 개회식 때 신고 뛸 운동화를 손질하고 있어 안심할 수 있었다’라며 기술했다.

요미우리 등 일본언론 오보 사과 외면

이 같은 해프닝의 시발은 요미우리신문과 도쿄신문이 ‘특종 의식’에 젖어 기자단의 엠바고를 깨고 서울올림픽 개회식 성화 봉송 최종 주자를 손기정으로 성급하게 보도한 데서 비롯됐고 이에 맞서 올림픽조직위가 최종 주자를 임춘애로 교체한 결과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이 끝난 지 37년이 됐지만 요미우리신문과 도쿄신문은 그날의 ‘오보’에 대해 정정하거나 사과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종세(대한언론인회 부회장·전 동아일보 체육부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