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타까운 일이었다. 국내 당구대회 최다 우승자와 기록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국내 당구계 소식에 정통한 몇몇 당구인에게 물어봐도 답변은 대동소이했다.
“글쎄요. 기록이 없기 때문에 누구라고 딱 꼬집어 얘기하긴 어렵겠는데요.”
“몇몇 선수가 떠오르는데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따라서 ‘국내대회 최다 우승자’를 꼽는건 불가능했다. 다만 당구계 인사들의 경험과 기억에 따르면 시대별로 다수 우승자들이 있었으니…. 그렇게 해서 나온 이름이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고 이상천-장성출-김정규-박승희-이천우-황득희-고 김경률 등이다. 꾸준한 성적을 거둔 김무순 임윤수 얘기도 나왔다. 물론 기록 대신 기억에 따른 것이니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당구연맹 집계 이후로는 최성원-조재호-허정한-강동궁-이충복이 우승기록이 많았다)
그 중 한명이고 ‘한국 당구 레전드’인 김정규 원장(62·김정규당구스쿨) 인터뷰로 당구대기록 시리즈 ‘국내대회 최다우승’ 편을 가름한다. 그는 우리나라 당구 최초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98 방콕아시안게임 동메달)에다 국가대표 감독을 거쳐, 현재 서울 송파구에서 김정규당구스쿨을 운영하며 후진 양성 중이다.
80년대 말~90년대 말 전성기였던 김 원장은 그 동안 공식·비공식적으로 약 150여 대회에 출전, 50차례 우승했다고 한다. 다만, 김 원장 스스로도 당구인프라가 열악했던 시절이라 우승 기록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한창 활동하던 당시 대회 사정은 어땠나. (그는 86년에 당구선수를 시작, 2000년 초반까지 활동했다)
=제가 활동하던 시절 국내 당구대회는 대부분 사단체에서 주최했기 때문에 ‘정식기록’ 이 전무했다. 당시 ‘대회‘란 지금 흔히 생각하는 대회 개념보단, 그저 당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 실력을 겨루는 것이었다. ‘월례대회이자 전국대회’라고나 할까. 물론 그래도 당시 대부분의 대회에서 제 이름이 최상단에 걸려있기는 했다. 제가 출전했던 대회가 줄잡아 150회 가량 될 텐데, 여기서 한 50번 정도는 우승한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98방콕아시안게임이 끝나고 후유증을 심하게 겪었다고 하던데.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내게는 사실 너무 아픈 기억이다. 부담감이 정말 엄청났다. 마치 내가 우리나라 모든 당구인들의 희망과 기대를 짊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동메달에 그쳤으니 죄책감이 오죽했겠는가. 준결승(상대는 일본의 시마다 아키오)서 패하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슬펐던 거 같다. 그 뒤로 4~5년 정도 극심한 후유증을 겪으며 큐도 놓아버렸다.
▲그럼에도 베트남 리더 빈과의 첫 경기는 아직도 회자되는 명경기였다.
=16강 토너먼트 첫 경기 상대가 리더 빈이었는데 정말 영화 같은 경기였다. 대회 출전할 때만 해도 베트남 선수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맞닥뜨리니 ‘아차’ 싶더라. 리더 빈의 경기운영이 너무 특출났기 때문이다.
50점제 경기에서 36:45로 밀릴 때 ‘타임’을 요청하고 잠깐 나가서 생각했는데, 머리가 하얘졌다. 당구인 기대와 희망이 막 떠오르는데 패색은 짙고 정말 억장이 무너지더라. 그때 ‘여기서 떨어지면 집에 못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들어가서 나머지 14점을 치는데 단 하나도 허투루 친 공이 없었다. 공 하나하나, 마지막 1점까지 초집중해서 쳤다. 그렇게 50:45로 역전승했다.
▲큐를 다시 잡게 된 계기는.
=98방콕아시안게임 이후 4~5년 동안 후유증에 시달리며 큐를 잡지않았다. 그러다 (이)상천 형이 한국에 다시 들어왔을 때 자연스럽게 둘이 당구를 치며 다시 큐를 잡게 됐다. 사실 그 후로는 선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며 차츰 지도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당구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 ‘비디오분석법’을 처음 도입했는데.
=당구는 기록경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우리나라에는 데이터라는 게 거의 없었다. 지도자 입장에서 기록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대표선수(고 김경률, 허정한)들이 피드백을 원해 카메라를 하나 샀다. 그걸로 선수들을 계속 촬영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럴 게 아니고 선수가 치는 방식을 기록으로 남겨보자’. 그때부터 바깥돌리기, 앞돌리기, 옆돌리기 등 여러 플레이 형태를 선수별로 구분해 파일로 만들었다.
▲비디오분석법을 해보니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나.
=대표 선수들의 바깥돌리기, 옆돌리기, 앞돌리기, 비껴치기 등 성공률은 81~83%였다. 열 번 치면 여덟 번 이상 성공하는 쉬운 배치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걸 수치화하니 여기서 0.1%포인트를 끌어올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걸 높이기 위해 촬영한 걸 보고 개선점을 찾아냈다. 고 (김)경률의 바깥돌리기 성공률이 84.7%였는데 대단한 기록이다. (허)정한이의 옆돌리기 성공률을 높이는데도 활용했다. 지금도 정한이 경기 볼 때 옆돌리기를 유심히 본다.
▲다시 옛날 얘기로 돌아가서, 당구인생의 출발점이 궁금하다.
=나는 소위 ‘금수저’ 출신이다. 그런데 80년대 초반 경제위기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그때 서울로 상경해 당구테이블 수리공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당구를 자주 치러 다녔다. 그런데 고향(전북 익산)에서 나름 실력자였는데 서울에서 별 힘을 못 쓰고 번번이 져 자존심이 상했다. 지는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맹연습하며 당구를 제대로 시작하게 됐다.

▲결과는 어땠나.
=물론 졌다. 하하. 그렇지만 그 후로 상천 형이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내가 맞상대 역할을 많이 했고, 그러면서 이길 때도 꽤 있었다. 상천 형도 처음에는 나를 인정하지 않더니 나중에는 인정해 주더라. 나보다 여섯 살 위인데 그때는 일부러 ‘형’이라 부르지 않았다. 당구로 이겨야 하는 상대인데 형이라 부르면 기에 눌릴 것 같아 나름 경계 표시를 한 것이다.
▲그때 에피소드로 ‘똘이장군’이란 별명을 얻게됐다고.
=겁 없이 덤벼드는 모습을 보고 상천 형이 붙여준 별명이다. 원래 고향에서 내 별명이 ‘똘똘이’였는데, 여기에 장군을 붙여 ‘똘이장군’이라 했다. 아마 당시 이 별명으로 워낙 유명했기에, 제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지금도 많지 않을 거다. ‘당구하면 똘이장군’이라는 말도 돌았다. 하하.

▲지도자 입장에서 올해 활약이 기대되는 선수는.
=모두 잘해주고 있으니 특별히 지목하기는 어렵다. 다만 올해 제대한 (조)명우는 특별히 기대하고 있다. 얼마 전 통화하며 조언해줬는데, 제대 이후 아직 경기감각이 완전히 살아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 밖에도 (김)준태, (김)행직 같은 젊은 선수들을 응원하며 기대하고 있다. PBA에선 (강)동궁이가 (프레드릭)쿠드롱 독주를 막아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당구인생만 40년이다. 자신에게 당구란.
=말 그대로 평생 함께 가는 ‘인생’인 것 같다. 처음에는 즐거운 게임으로 즐겼지만 이후에는 내 삶의 일부분이 됐다. 당구는 내 삶의 희로애락이자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다. [김동우 김두용 MK빌리어드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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