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 연봉을 받는 은행 노조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앞세우는 행태가 올해도 반복되고 있다. KB국민은행 노조는 최근 사측과 임금·단체협약(임단협) 극적 합의를 봤지만, IBK기업은행 노조는 창사 이래 처음 총파업에 들어갔다.
은행 노조의 이 같은 행태를 향한 외부 여론은 싸늘하다. 임금 인상 요구의 정당성에 의구심이 던져지는 것엔 은행권이 거두는 수십조원 이자이익(이자수익-이자비용)이 임직원 경영 성과로 오롯이 평가될 수 있는지에 관한 논란이 깔려 있다. 국내 시중은행은 정부 라이선스(인가)라는 희소자원을 방패로 사실상 과점 체제를 구축했다.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시중은행 인가는 1992년 평화은행 이후 없다가 지난해 옛 DGB대구은행이 시중은행으로 전환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은행권 연봉·성과급 논란이 협의의 임금 문제에 국한할 수 없으며 은행 이익 평가와 사회경제적 책임까지 얽힌 다층적 이슈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막대한 이자이익에 정부 라이선스 기여도가 압도적이란 사실은 은행권에 뼈아픈 대목이다. 이는 현실 경제에서 정부·정치권 개입의 빌미로 작용하고 ‘관치금융’이 반복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국내 은행권이 관치금융 굴레를 벗지 못하는 이유다.
이유1 ‘절대 반지’ 라이선스
‘전당포 영업’으로 수십조원
은행은 남의 돈으로 대출을 해줄 수 있는 ‘라이선스’라는 특권에 기대 담보대출 중심 ‘전당포 영업’에 안주한다는 날선 비판에 직면했다. 국내 금융권이 사회적 후생 증대라는 순기능을 키우지 못하고 담보대출에 몰두하는 것은 관치금융이 근절되지 못하는 주된 배경으로 지목된다.
김병환 금융위원장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권 이자이익을 삼성전자를 비롯, 수출기업 영업이익에 견줘 대립각을 세웠다. 이들 발언은 ‘은행권이 거둔 수십조원의 이익을 설명하는 요인이 정부 라이선스를 빼고 나면 무엇이 있느냐’는 취지로 해석됐다.
우선, 제조업과 금융업의 이익 창출 방식은 180도 다르지만, ‘영업이익’과 ‘이자이익’을 상호 비교하는 것엔 무리가 없단 평가다.
따져보면 이렇다. 은행은 업종 특성상 손익계산서에서 제조업처럼 매출액과 매출원가에 대응되는 계정은 없다. 은행의 경우 제조업과 달리 생산과 판매 시점을 구분할 수 없어서다. 제조업 매출액에 대응되는 계정은 금융사 이자수익에 금융자산 평가·처분이익, 수수료수익 등을 더한 것으로 보면 된다. 제조업 매출원가의 경우 금융사 이자비용에 금융자산 평가·처분손실, 수수료 비용 등을 더한 것과 비슷하다. 즉, 판매관리비 등 제반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주된 영업활동으로 발생하는 이익’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업이익’과 ‘이자이익’이 곧잘 대응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은행권 이자이익은 2019년 40조7000억원에서 2023년 59조2000억원까지 늘었다. 지난해 1~3분기 이자이익도 44조4000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2000억원 늘었다. 이는 이 기간 국내 대표 수출기업 삼성전자 영업이익(약 26조2000억원)은 물론, 현대차(약 11조5000억원), LG전자(약 3조2500억원)를 모두 더한 것보다 3조원 많다.
문제는 제조업과 달리, 은행의 경우 이익 원천을 들여다봤을 때 정부 라이선스를 제외하면 별다른 기여 요인이 관찰되지 않다는 데 있다.
이들 대표 수출기업은 대내외 경영환경 변화에 따라 치밀한 경영전략을 세우고 사활을 건 연구개발(R&D)로 비용 절감과 혁신을 이뤄 질적 도약을 이룬다. 반면, 은행 이자이익은 가계·기업대출에서 나온다. 가계대출 60% 정도는 주택담보대출로 이뤄진다. 기업대출 역시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대출이 대부분이다. 이런 구조 아래 국내 은행권은 금리 인상기 땐 대출 금리를 빠르게 올리고 예적금 금리는 천천히 올리는 방식으로, 금리 인하기 땐 대출 금리는 천천히 내리고 예적금 금리는 빠르게 내리는 방식으로 손쉽게 돈을 벌었다. ‘절대 반지’ 정부 라이선스가 은행권 이익 핵심 원천이란 지적이 끊이지 않는 배경이다.
이유2 무색무취 금융
공급자 중심 상품 판매
무색무취 금융 서비스는 은행 수익 원천에 정부 라이선스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논리로 귀결되고 이는 관치금융 증폭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는 지적이다. 금융당국이 경쟁 촉진을 위해 은행권 계좌이동 서비스 확대에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미풍’에 그친 것도 ‘서비스가 모두 비슷해 옮길 유인이 없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금융지주 사외이사를 지낸 서울 주요 대학 A교수는 “임직원 혁신이나 차별화된 서비스 등 개별 요인에 따라 은행 수익이 달라진다고 볼 수 없다. 시중은행을 모두 합쳐 딱 하나만 남겨도 소비자들은 차이점을 못 느낄 것”이라고 꼬집는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도 “우리나라 은행은 어떤 은행이 더 낫다는 평가가 힘들 만큼 서비스가 모두 비슷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금융 서비스로 사회적 후생이 개선되려면 ▲금융 소비자에게 이전보다 더 낮은 가격에 서비스 제공(비용 경쟁력) ▲새로운 금융·대출상품 개발(상품 경쟁력) ▲조달 금리 인하에 따른 가산금리 조정(금리 경쟁력) ▲중저신용자 대출 접근성 확대(신용평가모델 고도화) 등이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실은 정반대다. 비이자이익을 늘리려 상품 구조가 복잡하고 원금 손실 위험이 큰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의 절반가량을 60세 이상 고령자에게 팔았다 대규모 손실로 거센 역풍을 맞았다. 예금과 ELS는 속성이 전혀 달라 대체재로 볼 수 없음에도 상당수 고객은 만기가 돌아온 정기예금을 ELS에 넣도록 권유받았다.
KB·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금융그룹은 해외 부동산 투자에서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다는 점도 입방아에 오른다. 은행권은 증권사가 셀다운(재매각)한 해외 부동산 투자 상품을 대거 팔았다가 이 역시 불완전판매 논란에 휘말렸다.
이유3 손실 사회화·이익 사유화
홍콩 ELS 수수료 이익 7000억 육박
‘손실은 사회화하고 이익은 사유화한다’는 비판도 은행권에 관치 족쇄를 채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이는 쉽게 말해, 장사를 해서 이익이 나면 은행이 챙기고 손실이 나면 국가·사회가 짊어진단 의미다.
작금의 시중은행 생태계는 정부와 제도가 만들어준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98년 외환위기 때 국내 대부분 시중은행은 무분별한 기업대출로 부도 위기에 몰렸다. 공적자금 168조원을 넣어 구조조정을 완료하고 기사회생했다. 이후 금융위기 가능성을 줄이려 정부 주도 은행 통폐합이 이뤄져 규모의 경제 기반을 다졌다. 은행수익 다각화 기반도 속속 마련됐다. 금리 자유화, 주택대출 자유화, 펀드·보험 상품 판매 허용 등 은행 영업 범위가 확대됐다. 그 결과 지금처럼 매년 수십조원의 이자이익을 버는 은행 생태계가 구축됐다.
그러나 은행은 최근까지도 ‘손실의 사회화·이익의 사유화’ 행태가 팽배하단 지적이다. 부동산 PF 부실이나 ELS 사태로 사회적 후생은 큰 손실을 봤지만 정작 은행권은 막대한 수수료 수입을 올렸단 비판이 비등하다.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은행이 2021년부터 2023년 3분기까지 ELS 판매 수수료로 얻은 이익은 6815억원에 달한다. 은행권은 홍콩 ELS 사태 여파로 손실을 우려한 고
객이 이탈하는 과정에서도 적잖은 수수료를 챙겼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3분기 국내 21개 은행은 홍콩 ELS 등이 포함된 신탁 상품을 만기 전 깬 고객들로부터 349억원에 달하는 수수료를 거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4 소유분산 구조
이사회 낮은 독립성
소유분산 구조 아래 이사회의 낮은 독립성도 관치를 초래하는 고질적인 병폐로 지목된다. 이사회가 은행계 금융지주 CEO의 제왕적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정부가 개입할 빌미가 됐다는 지적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2001년 금융지주사 제도 도입 이후 김정태 전 하나금융 회장(4연임·10년)과 라응찬 전 신한금융 회장(4연임·9년), 윤종규 전 KB금융 회장(3연임·9년) 등 상당수 금융지주 CEO는 장기 집권했다.
은행계 금융지주 같은 소유분산기업에서는 ‘대리인 문제’가 자주 입길에 오른다. 대리인 문제는 주주와 경영자 간 이해관계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하는데, 소유분산기업일수록 ‘대리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리인 비용’도 커진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일반적으로 소액주주는 경영자에 대한 모니터링 비용(Monitoring Cost)이 견제와 감시로 인해 예상되는 이익보다 크다. 이 탓에 견제와 감시에 허점이 존재하므로, 소유분산기업 경영자 입장에서는 회사를 지배하고픈 유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 황인태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소유분산기업 이사회는 사외이사 비율이 높은데, 이들은 대부분 대표 거수기 역할을 하면서 대표를 포함한 일부 사내이사에게 힘이 집중되는 구조”라고 진단한다.
이런 구조 아래 은행계 금융지주 CEO는 사외이사들과 ‘공생 관계’를 구축해 연임하거나 회장 측근을 차기 회장으로 선출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금융지주 회장을 두고 ‘연임은 필수, 3연임은 선택’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돈 배경이다.
지금처럼 금융지주 사외이사 후보군이 CEO 영향 아래 관리되는 구조로는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게 매우 까다롭다. 은행계 5대 금융지주가 공시한 ‘2023년 지배구조 및 보수 체계 연차 보고서’에 따르면, KB·신한·하나·우리·NH농협금융지주 사외이사 평균 연봉은 7500만원으로 나타났다. 금융권 관계자는 “사외이사가 자신을 추천해준 대표이사 연임에 암묵적으로 동의해주면 연 1억원 가까운 소득이 보장되는데, 이런 구조로는 독립적인 이사회 운영이 사실상 힘든 구조”라고 지적했다.
정부도 ‘전당포 영업’ 조력자
은행 경쟁 촉진 불씨 살려야
정부 역시 은행권 ‘전당포 영업’ 고착화에 일조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해엔 은행의 ‘땅 짚고 헤엄치기 식’ 이자 장사를 견제해야 할 금융당국마저 조력자로 나섰단 지적이 비등하다. 금융당국이 대출 급증을 막기 위해 시중금리가 떨어지는데도 은행들이 대출 가산금리를 올리게 했고 결국 예금 금리는 떨어지고 대출 금리가 올라가 예대금리차가 벌어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관치금융 굴레를 벗어날 수 있게 은행업 규제의 틀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무엇보다 금융과 비금융사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블러(Big Blur) 현상 가속화’ 때문에 은행의 비금융업 진출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자본의 분리) 규제 완화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금융당국은 오는 6월까지 금융지주 핀테크 출자 제한을 완화하기 위한 법안·시행령 개정에 나선다. 다만, 정치 불확실성이 커진 터라 법 개정까진 첩첩산중이다. 실질적인 효과를 내려면 금융지주 자본비율 규제도 일부 완화해야 한다는 조언도 뒤따른다.
은행 생태계 역동성 제고를 위한 경쟁체제 조성도 갈급한 과제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와 양기진 전북대 로스쿨 교수는 ‘은행업 진입규제 제도 개선 방안’ 보고서에서 “금융산업 경쟁이 강화될 경우 쏠림을 억제하는 가운데 수익 다각화 압력이 커지면서 가계부채나 부동산 PF 증가세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 “신규 플레이어들을 은행 시장에 진입하도록 하는 정책은 시스템 위험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경쟁이 과열되지 않도록 당국의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5호 (2025.02.05~2025.02.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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