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wikimedia](https://wimg.mk.co.kr/meet/neds/2018/11/image_readtop_2018_749006_15435252633551703.jpg)
섹스 피스톨즈의 시작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여곡절을 거쳐 자니 로튼(Johnny Rotten), 글렌 매틀록 (Glen Matlock), 스티브 존스(Steve Jones), 폴 쿡(Paul Cook)으로 라인업을 시작한다. 로커를 분류하면 무대 위 혹은 무대 아래서만 로커인 사람과 무대 위에서나 아래서나 전부 로커인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섹스 피스톨즈는 전형적인 후자의 캐릭터로 똘똘 뭉친 집단이었다. 자니 로튼이 섹스 피스톨즈 오디션에서 합격한 가장 큰 비결 중 하나는 오디션 당시 그가 입고 있던 옷에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 인기 밴드라 할 수 있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를 디스하는 'I hate Pink Floyd' 티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이키델릭록의 정점을 찍은 핑크 플로이드는 특유의 예술성을 인정받은 최고의 실력파 밴드였다. 대중과 평단 모두가 좋아하는 핑크 플로이드를 대놓고 디스하는 티를 입고 돌아다닐 만큼의 '똘끼'를 보여준 것이었다. 시중에서 파는 '핑크 플로이드' 티셔츠에 'I hate'를 굳이 적어 넣어 만든 '핸드메이드' 티셔츠였다. 당시 왜 자니 로튼이 그런 옷을 입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기 힘들지만 아마도 추측하건대 '인기 있는 게 꼴사나워서' 혹은 '별 생각 없이'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유 없는 비난, 책임지지 않는 껄렁함,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함,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책임함이 섹스 피스톨즈의 상징이었다. 자니 로튼은 섹스 피스톨즈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똘끼 충만'한 캐릭터였다.
그들이 펑크음악을 들고나온 것은 필연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아트 록'과 유사한 음악을 할 수 있는 역량 자체가 없었다. 아마추어 수준을 채 벗지 못한 조악한 연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더 노래를 잘하는가, 누가 더 빠른 속도로 기타를 칠 수 있느냐에 따라 밴드의 서열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섹스 피스톨즈는 '왜 록음악이 이렇게 클래식과 비슷해야 하는가' '왜 록음악이 이렇게 고상해졌나' '아무 생각없이 즐기고 싶은 음악을 왜 수학으로 만들었느냐'는 근원적인 물음에 음악으로 대답을 대신한 청춘 문화의 물결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껄렁함과 예의 없음, 독설과 욕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행보는 당시 청년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얻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청춘의 대변인이었다.
이들이 펑크록의 상징, 펑크록의 창시자로까지 불리는 것은 사실상 불모지였던 펑크를 록계 주류로 끌어올린 공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펑크록은 아주 마이너한 하위 장르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들이 형편없는 연주력과 함께 도발적으로 던지는 메시지에 청년들이 공감하면서 음악계 전반에 섹스 피스톨즈 이름은 널리 퍼지게 됐다. 이것은 단지 차트 안에서 일어나는 '그들만의 리그'라기 보다는 거대한 문화현상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결국 수십 년이 지나 록계는 물론 음악계 전반을 뒤흔들어 버린, 너바나란 밴드로 마이클 잭슨을 빌보드 차트에서 이긴 얼터너티브 록의 태동 역시 다분히 펑크에 빚진 것이다. 펑크록 직계 후배로 볼 수 있는 그린데이나 오프스프링은 더 말할 것도 없겠다.
1975년 가을, 멤버를 확정하고 11월경부터 공연을 시작했는데 그들이 지향하는 바대로 무대 매너는 프로페셔널과는 거리가 멀었다. 관객과 뒤엉켜 패싸움을 벌이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고, 제대로 튜닝도 하지 않은 채 불협화음을 들려주며 막장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유 없는 분노, 책임지지 않는 욕설은 쉴 새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행보가 이들을 서서히 인기 밴드 반열로 올리게 된다.
다음 해인 1976년 메이저 음반사인 EMI와 계약을 맺고 이들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아나키 인더 유케이(Anarchy in the UK)'가 세상에 나온다. '영국의 무정부'로 해석되는 이 곡은 대략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Right now ha, ha, ha, ha, ha(바로 지금 하하)
I am an anti-Christ(난 안티 크라이스트)
I am an anarchist(난 무정부주의자)
Don't know what I want(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지만)
But I know how to get it(어찌 해야 하는지는 알아)
I want to destroy the passerby(난 그냥 지나가는 사람 패버리고 싶어)
Cause I want to be anarchy(난 아나키가 되고 싶으니까)
No dogs body(개의 자식이 아니니까)
Anarchy for the U.K.(영국의 무정부)
It's coming sometime and maybe(언젠가 그날이 올 거야)
I give a wrong time, stop a traffic line(난 시간을 돌려버리고, 교통을 마비시킬 거야)
후략
한마디로 그냥 세상 돌아가는 꼴 자체가 다 마음에 안 든다는 가사다. 불만으로 똘똘 뭉친 찌질이가 내면에 가득 쌓인 분노를 아무 데나 터트리며 세상을 뒤엎고 싶다는 철없는 발상이다. 하지만 경쟁에서 밀리고, 세상에서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는 하층민 노동자에게는 이만큼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가사가 없었다. 음악을 하는 이유가 삐딱한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이 어려울 필요도 없었다. 가장 쉬운 3코드로 일관하는 심플함을 내세워 '누구나 할 수 있다'(anyone can do it), '너 스스로 하라'(do it yourself)의 메시지를 전파했다(이 메시지를 듣고 내놓은 음반이 너바나의 네버 마인드(Never Mind)라 할 것이다.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이 예상과 다르게 프로듀싱이 너무 깔끔하게 나와 분노했다는 기록은 그가 지향하는 바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게 한다). 이들의 다른 곡인 '갓 세이브 더 퀸(God Save the Queen)'은 대놓고 영국 왕실을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방송에 나가서 '더러운 개자식(You dirty bastard) 더러운 XX놈(You dirty fucker)'이란 욕설을 해 대중의 분노를 한곳에 모으기도 했다(하지만 섹스 피스톨즈 팬들은 이런 점 때문에 그들을 사랑했다).
섹스 피스톨즈 얘기를 하면서 시드 비셔스의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섹스 피스톨즈 2기 베이시스트로 들어온 시드 비셔스는 펑크의 상징이었다. 베이시스트인데도 베이스를 거의 못 쳤던 독특한 멤버였다. 하지만 인생 자체를 펑크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굴곡진 삶을 살았다. 공연에서 약에 취해 깨진 맥주병으로 몸을 그으며 자해했고, 베이스를 치는 대신(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못 쳤다) 관객과 말싸움을 해 화를 부추긴 뒤 무대에 오른 관객을 베이스로 구타하기도 했다. 그는 여자친구 낸시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됐다고,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이후 다량의 헤로인을 흡입하고 마약중독으로 짧은 생을 마쳤다. 1979년, 만 24세의 나이였다.
섹스 피스톨즈가 내놓은 정규앨범은 단 한 장에 불과하다. 그들은 영원히 전설로 끝날 것 같았지만 1996년 재결합에 성공한다. 재결합에 나선 가장 큰 동기 역시 섹스 피스톨즈 다웠다. 공식 인터뷰를 통해 '돈 때문이었다'고 선언했다. 2011년까지 펑크의 전설로 대접받으며 적잖은 돈을 벌었다.
섹스 피스톨즈의 일대기를 보면 인생의 성공이(섹스 피스톨즈를 놓고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음악계에 미친 영향, 그리고 후배들의 존경은 거장으로 취급받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노력과 참을성, 인내와 성실함에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이 나온다. 욕을 먹는 것을 감수하고 제대로 된 또라이 짓을 할 수 있는 근성과 결기를 보여주면 나름대로 세상의 평판과 재물을 얻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섹스 피스톨즈는 데뷔부터 활동, 그리고 재결합 이후로도 영원히 펑크 밴드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성공을 이룬 밴드라 할 만하다.
[홍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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