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은 송원 시절 빈번한 해상무역이 이뤄졌다. 중국 해상사업의 절정은 명나라 영락제 시절이다. 명의 환관인 정화는 황제의 명을 받아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회에 걸쳐 인도양을 탐험했다. 60여 척의 대형 함선과 100척 정도의 소선에 약 3만명의 인원을 데리고 18만5000㎞ 거리를 항해한 대규모 사업이다. 가장 큰 배는 길이 150m, 폭 60m로 19세기 영국 해군의 가장 큰 배보다 3배나 컸다고 한다. 정화의 선단은 인도양 30개국을 방문하고 멀리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방문했다.
정화의 선단이 이렇게 바다를 누빈 이유는 인도양 각국에 대한 중국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명은 갑자기 쇄국정책으로 전환하고, 정화의 해양 원정과 관련된 기록도 거의 다 삭제했다. 명의 정책이 전환된 이유는 해상보다 대륙 경영에 치중하며 북쪽 오랑캐 견제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어찌 됐든 명나라가 해금정책을 실시한 15세기 이후 인도양은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프랑스의 안마당이 됐다. 이어 이들 나라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인도, 인도차이나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제국주의 국가가 됐다. 명나라가 해상사업을 지속했다면 인도양의 패권도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국이 이제는 3개의 항모전단을 운용하고 인도양과 태평양에 제1·2·3도련선을 그으며 미국의 해상 패권에 도전하고 있다.
조선도 명나라의 해금정책을 본받아서인지 바다로 진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중국과의 조공무역, 일본과의 왜관무역에만 치중했다. 은둔의 국가 조선은 20세기에 우리보다 먼저 해상교역을 해온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치욕을 겪게 됐다.
조선업이 쇠퇴한 미국은 중국과의 전략 경쟁, 해상 공급망 확보를 위해 조선업을 재건하려 한다. 그 파트너로 한국을 선택했으며 그 점을 파고든 것이 마스가 프로젝트다. 우리는 쇄국과 은둔의 조선에서 다시 바다로 진출하는 해상 세력의 중심이 되어 미국의 조선업을 부활시키는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됐고 그로 인해 관세협상에서도 유리한 카드를 쥐게 됐다. 미국과 손잡고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우리 기업들이 조국의 번영을 이끄는 원대한 항해를 하길 기원한다.
[신응석 변호사·전 서울남부지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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