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발간된 IPCC 제6차 평가보고서(AR6)에서는 건물 부문을 '가장 비용 효율적인 감축 수단'으로 강조하고 있다. 고효율 설비, 단열 성능 강화, 에너지 수요 관리, 재생에너지 통합에 대한 기술 성숙도와 사회적 수용성이 높아서 탄소중립의 빠른 실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은 이를 바탕으로 신축 제로에너지건축물(ZEB) 확대와 기존 건축물의 그린 리노베이션을 국가 탄소중립 이행의 출발점으로 삼고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2020년부터 공공건축물 ZEB 의무화, 기축건물 에너지 효율 개선 그린 리모델링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건물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은 여전히 증가 추세다. 이는 1인 가구 급증에 따른 주택 수요 증가, 냉난방 사용량 증가 등 사회 구조적 변화와 고효율 기기 도입, 단열 성능 향상 등에도 불구하고, 재실자의 쾌적성 추구 기대가 높아져 건물 에너지 사용이 오히려 증가하는 '리바운드 효과'로 에너지 절감 효과를 상쇄하고 있다.
따라서 단순 법 제도 강제만으로는 탄소 감축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현장 적용이 가능한 실질적 저탄소 기술의 개발과 이를 제도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유연한 신기술 인증체계 구축이 필수적이다. 최근 히트펌프 기반 주거 난방, 고전도성 축열형 바닥난방 시스템, 인공지능(AI) 기반 수요예측 냉난방 제어기술 등 다양한 고효율 건축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 건물에너지효율등급을 산정하는 인증체계에 이러한 우수 기술이 반영되지 않고 있으며, 건설사들 또한 이를 외면하고 있어 기술이 현장에서 채택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제약은 국내 탄소중립 정책의 실행력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국내 기업의 세계 ZEB 및 그린 리모델링 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어렵게 만든다. 우리가 개발한 고효율·저탄소 건축기술이 국내에서 상용화되고 그 효과가 입증되면, 이는 곧 글로벌 ZEB 및 그린 리모델링 시장 진출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고성능 건축물 수요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국내 정책과 시장은 세계 시장 진입을 위한 전략적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탄소중립 실현은 기술, 제도, 정책, 시장이 유기적으로 연계된 선순환 구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이제는 신기술의 정당한 평가와 유연한 인증체계 그리고 현장 적용을 촉진할 제도적 기반 마련이 시급하다. 우리가 탄소중립 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건물 부문이 실증과 혁신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송두삼 대한설비공학회 회장·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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