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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은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 공창석
  • 기사입력:2025.07.14 15:16:51
  • 최종수정:2025.07.14 15: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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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창석 전 경남 행정부지사
공창석 전 경남 행정부지사

광화문광장은 한국의 얼굴이며 상징이다. 오늘날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인 한국의 국가 상징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고유의 역사성이 중요하다고 본다. 과거를 이어 미래를 여는 국혼(國魂)이 살아 숨 쉬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광화문광장을 선진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

현재 광화문광장은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이 주인공이다. 마치 그들만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한 광장처럼 여기게끔 한다. 이순신 동상은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세웠고, 세종대왕 동상은 2009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세웠다. 물론 당시는 나라의 역량을 결집하고,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다는 시대적인 의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동상은 이미지가 과거 회귀적이고 보는 이의 시선을 제후국의 굴레를 쓰고 외세에 시달리다가 망해버린 조선에 머물게 한다. 그러기에 지금의 광화문광장은 과시적이며 특정 목적을 위한 형상화일 뿐이고, 역사성을 갖춘 선진의 상징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광화문광장의 역사성을 먹칠하는 두 개의 일이 추진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하나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광화문광장에 약 600억 원을 들여 6.25 참전 22개국을 기리는 ‘감사의 정원’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시장에 다시 당선된 후 광화문광장을 ‘국가상징공간’으로 만든다며 ‘100m 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하고 ‘꺼지지 않는 불꽃’ 상징물을 세우겠다고 하다가 이념 논쟁이 일어나 철회한 바 있다. 철회했으면 그만이지, 서울시의 재빠른 변신이 놀랍다. 그러나 광화문광장에 추가로 ‘감사의 정원’을 덧붙인다면 ‘국가상징공간’이기는커녕 앞의 두 동상과 어울리지 않는 형상물의 뒤틀림을 낳을 게 뻔하다.

또 하나는 광화문광장에 ‘광화문 스퀘어’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종로구청이 주도하는데,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스퀘어(Times Square)를 모방하여 광화문광장과 세종로 일대를 세계적인 미디어 랜드마크로 조성한다는 거다. 구체적으로는 광화문광장 일원에 9개의 대형 광고 전광판을 설치하고, 광장 바닥에 기둥 모양의 미디어 폴 전광판을 설치하여 360도로 펼쳐지는 초대형 미디어 아트 상업 광고를 하는 것이다. 이에 앞서 종로구청은 2024년부터 ‘명동 스퀘어’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명동 신세계백화점 일대에 1,700억 원을 투입하여 대형 전광판 16개, 미디어 폴 전광판 80기를 설치하고 미디어 광고를 내보내는 것이다. 명동이야 서울의 상업 중심지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변변한 상업성 건물 하나 없는 광화문광장을 최첨단 상업 광고로 도배하는 것은 국가 상징에 역행하는 난센스(nonsense)다. 생각해 보자. 만약 위의 두 가지 일이 완료되면 광장은 어떤 모습이 되나? 휘황찬란한 초대형 미디어 광고 불빛 아래에서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동상 그리고 광화문과 경복궁이 온전하겠는가? ‘국가상징공간’이기는커녕 세종대왕, 이순신, 6.25 전쟁, 최첨단 미디어 전광판이 뒤범벅된 역사성이 오리무중인 국적 불명의 기형 공간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광화문광장과 명동은 거기서 거기여서 ‘두 스퀘어’는 경쟁 관계가 되고, 결국 상업성이 모자란 ‘광화문 스퀘어’가 경쟁에서 밀려나 사람들이 외면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수 있다.

고려 십자거리시전 단오 축제(추정도).
고려 십자거리시전 단오 축제(추정도).

광화문광장에 고유의 역사가 있는가? 기막힌 빛나는 역사가 있다. 우선 세종로는 1394년에 조선이 개경에서 한성으로 천도하면서 본궁(경복궁)의 출입 도로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세종로는 630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다. 지금의 세종로는 폭 100m, 길이 약 750m이다. 폭 100m는 광화문 일대가 6.25 전쟁 중에 파괴되어 폐허가 되자, 복구하면서 1952년 3월 내무부고시로 정했다. 그 이전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일제가 고시한 약 53m였다. 일제는 왜 폭을 53m로 고시했고, 그 이전 조선시대에는 얼마였을까? 조선은 1426년 수도 한성의 도로 명칭과 폭을 기록한 도로대장을 작성했다. 도로 폭은 제후국의 규범에 따라 대로 56척(약 17.5m), 중로 16척(약 5m), 소로 11척(약 3.4m)이었다. 참고로 황제국은 대로 폭이 약 22.5m이다. 당시 세종로는 제후국의 대로로서 폭 17.5m에 해당하지만, 도로대장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조선은 세계적인 기록의 나라라 일컫는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고, 국보급의 수많은 기록물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세종로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다만 사람들이 도로 양편에 이조, 호조, 예조 등 육조(六曹)의 관아가 있어 통상 ‘육조거리’, ‘육조 앞’ 따위로 불렸다. 왜 도로대장에 등재하지 않았을까?

세종로의 비밀은 2008년에 비로소 밝혀졌다. 당시 세종로에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발굴 조사를 했는데, 폭 58m의 도로가 발굴되었다. 이 도로는 조선 초에 인공의 흙다짐으로 만든 도로였고, 폭이 58m이므로 도로 양측의 배수구를 참작하면 전체 폭은 60m 이상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일제가 약 53m로 고시한 것은 폭을 약간 줄인 것이다. 조선은 제후국이면서 왜 황제국의 대로보다 폭이 3배가량 넓은 도로를 조성했을까?

이 의문은 고려와 조선의 비교를 통해 풀어진다. 비교의 결과를 먼저 밝히면 궁궐 정문과 앞의 대로(광장)가 판박이로 빼닮았다. 고려와 조선은 궁궐 정문 이름이 광화문으로 똑같다. 다만 고려는 廣化門(광화문), 조선은 光化門(광화문)으로 한자가 다르다. 그러나 한자 ‘廣(넓은 광)’과 ‘光(빛날 광)’은 발음이 같고 뜻도 ‘임금의 큰 덕(德)이 나라를 비춘다’로 같아서 사실상 같은 이름이라 할 것이다. 고려보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든다며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이 왜 궁궐의 정문 이름을 고려와 똑같이 지었을까?

고려의 광화문과 앞 도로(광장)는 동시대 세계적인 걸작품이었다. 예를 들면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광화문이 위용이 넘치고 화려하다며 찬탄했다. 광화문 앞 도로(광장)는 폭이 약 60m로 넓었고, ‘십자 거리’ 또는 ‘십자거리시전’이라 불렸다. ‘십자거리시전’이라 함은 도로 양측에 상가가 있는 시장 거리였기 때문이다. 이곳의 상가는 독립 건물이 아니고, 길이 500m가량의 연이어서 지은 장랑(長廊)이었다. 다시 말하면 광화문 앞의 대로는 500m에 이르는 장랑이 가로 벽을 이루는 전문 상가 거리였다. 또한 이 도로에는 격구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사시사철 축제로 붐볐다. 대표적으로는 오월 단오절 3일간의 축제다. 축제 때 이곳에는 격구 경기가 열리고, 격구장 건너 쪽에 채붕이란 무대가 가설되어 여자 무용수 300여 명이 출연하는 화려한 공연이 펼쳐졌다. 이 축제는 동시대에 세계 최고급의 시장 축제라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에서는 유래가 없는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문화였다.

조선의 광화문은 1395년 경복궁의 정문으로 지었는데, 이름이 없었다. 이름을 작명하지 않고 그냥 남문, 정문, 오문 등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30년 후 1425년 세종대왕이 집현전(集賢殿)에 이름을 짓도록 지시하고,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光化門)으로 작명했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은 고려 말에 관리였거나 청장년의 나이였고, 또한 당시는 고려의 광화문이 건재하고 있었으므로, 뻔히 알면서 발음과 뜻이 같은 이름으로 작명한 것이다. 뒤늦은 작명도 의아한데, 왜 그랬을까? 무릇 어떤 물건이 같은 이름일 경우 모양이 유사하다고 여기는 것이 일반의 이치다. 따라서 집현전에서 한자만 살짝 바꾸어 광화문으로 작명했다면 두 문은 겉모습이 판박이로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어떻든 고려 광화문이 919년에 지었으니, 광화문은 1100년을 넘게 이어온 이름이고, 우리는 이토록 긴 세월 동안 광화문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아왔다. 여태껏 우리가 이를 간과한 것이 안타깝다.

그렇다면 조선의 폭 60m ‘육조거리(세종로)’는 어찌 된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 고려를 본떠 만들었다고 할 것이다. 조선은 명나라를 섬기는 제후국으로 출범하고, 수도 한성을 제후국의 규범에 따라 건설했다. 제후국은 황제국에 비해 성곽은 물론이고 궁궐의 규모와 위세 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단계 아래다. 그러므로 한성은 개경에 비해 성곽이나 궁궐 따위가 훨씬 작아지고 볼품이 없어지게 된다. 이점은 정도전을 위시한 조선의 설계자들에게는 큰 고민거리였다. 고려 백성에서 조선 백성으로 바뀐 사람들, 더군다나 한성으로 이주한 개경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한성의 품격이 개경에 뒤지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경복궁의 정문을 고려의 광화문과 유사한 형태로 짓고, 앞 광장 역시 같은 모양새로 조성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고려처럼 축제는 열리지 않았다. 조선이 성리학에 경도되어 축제를 사회 기강을 해치는 나태한 놀이판으로 여기고 폐지한 탓이다. 광장은 텅 비어 있었고 근엄하고,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기본으로 유지했다. 그야말로 유교 풍의 광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육조거리 모형도(서울역사박물관, 거리 행렬은 정조대왕의 어가 행차).
육조거리 모형도(서울역사박물관, 거리 행렬은 정조대왕의 어가 행차).

오늘날 서울은 600년 도읍을 자랑하지만, 내로라할만한 역사문화유적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외국 관광객이 반길만한 유서 깊은 종교시설조차 하나 없다. 기껏해야 궁궐과 남대문 동대문 등 성곽의 문루뿐이다. 조선 말에 포교하려고 온 서양 선교사들은 한성은 종교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괴이한 도시라고 했다. 이것은 조선이 성리학 외의 종교를 박해하고 한성에서 종교시설을 철폐한 탓이다. 현재 서울에서 조선의 냄새를 한 덩어리로 맛볼 수 있는 곳은 경복궁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광화문광장(세종로)에 기존 세종대왕과 이순신의 이미지에다가 6.25 전쟁의 형상물과 최첨단 미디어 전광판이 난무하게 한다면 그나마 한 줌 남은 경복궁의 조선 냄새를 깡그리 말살시킨다고 할 것이다.

결론으로 정리하면, 우리는 고려 이래로 천년 넘게 수도에 웅장하고 화려한 광화문을 짓고, 그 앞에 폭 60m에 달하는 광장을 만들어 놓고 살았다. 그곳은 누구나 왕래하고, 만나 떠들고,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궁궐 정문 앞의 드넓은 소통의 광장, 이것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문화다. 조선은 비록 제후국으로 몸을 낮추었지만, 광화문과 광장은 고려의 모습을 이어갔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이를 민족 정체성의 상징으로 존중하고, 이것만은 이어가야 할 문화로 여겼다. 이제 광화문광장은 단순히 조선왕조의 얼굴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얼이 영근 문화 광장으로 자리매김하고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에 ‘감사의 정원’과 ‘광화문 스퀘어’는 철회하는 게 마땅하다. 앞으로 광화문광장은 지금의 뒤죽박죽 형상물들을 걷어내고 고려와 조선처럼 텅 비게 해야 한다. 그 바탕에서 천년을 이어온 역사를 되살리고, 선진의 상징을 새롭게 구현하고, 미래를 꽃피어 올려야 한다.

[공창석 전 경남 행정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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