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 이날 도입한 보편·상호관세는 실질적인 WTO 탈퇴를 의미한다. 한편에서는 "해방의 날이 WTO로부터의 해방이지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의 종언을 선언한 것은 아니다"고 반론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이러한 반론이 현실이 될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럼에도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을 논하는 건 실물경제 질서를 관장하는 WTO 체제와 달러(USD)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융경제 질서가 더 이상 양립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세계 최대 채무국인 미국이 더 이상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를 유지하기 힘들어진 재정적 현실과 연결된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이 무려 120%에 달하는 세계 최대 채무국이다. 게다가 무역수지 적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경상수지 적자는 곧바로 대외 채무 증가로 이어지기에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역수지 적자를 개선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획기적인 수는 보이지 않는다. 개방적인 WTO 체제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모두 유지하는 동시에 무역수지를 크게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트럼프의 관세정책마저 '신의 한 수'가 되기엔 역부족이다.
설상가상으로 전 세계 군사비 지출의 37%를 차지하는 미국의 군사비 지출은 2024년 GDP 대비 3.4%에 이른다. 이런 재정 압박 속에서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를 포기하는 건 실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의 최대 수혜자였던 한국이 위기를 피할 수 없음을 뜻한다.
벼랑 끝에서 우리나라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필자는 크게 두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유지·강화하는 데 그치지 말고 독립적 국방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잠재적 핵 능력 보유 등이 그 예시다.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가 약화될 경우 가장 먼저 경제협력 파트너의 지위를 잃는 국가는 안정적이고 독립적인 국방력을 갖추지 못한 곳이다. 따라서 국방 능력은 곧 핵심적인 경제정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추진해야 한다. 한국 경제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특성상 안정적인 글로벌 공급망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기존의 국제 무역체제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할 기반을 갖추기 위해 CPTPP 가입이 절실히 필요하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붕괴는 우리나라에 안보, 국제 정치, 그리고 경제정책 순서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바라볼 안목과 빠르게 대응하는 순발력을 통해 팍스 아메리카나 이후에 펼쳐질 미지의 위협에 유연히 대처할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박지형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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