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빌리어드뉴스 MK빌리어드뉴스 로고

한 권의 책을 끝까지 믿은 사람들, 그들이 만든 노벨상 [기자24시]

  • 김유태
  • 기사입력:2025.10.16 11:24:01
  • 최종수정:2025-10-16 11:36:13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202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헝가리 묵시록 문학의 거장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들이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진열된 모습. [뉴스1]
202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헝가리 묵시록 문학의 거장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들이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진열된 모습. [뉴스1]

‘사탄탱고’를 처음 읽은 건 2018년 5월 13일이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이름이 호명된 뒤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다 개인 페이스북 글을 확인해보니 저 날짜였다. 책의 서지정보를 보니 ‘사탄탱고’ 출간일은 그해 5월 9일. 출간 소식을 듣고 즉시 구매해 떨리는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쳤다.

덜 알려진 헝가리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을 굳이 마음에 쟁여뒀던 이유는, 유럽 문학에 조예가 깊어서가 아니라 한강 작가의 2016년 부커상 수상 직전 해인 2015년 부커상 주인공이 크러스너호르커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이 책의 한국어판은 초판 당시 붉은 표지와 검정 표지로 각각 인쇄됐는데, 개별 선택이 아닌 ‘랜덤 발송’이어서 어떤 색의 표지가 내게 도착할지 작은 호기심도 일었다.

이후 ‘사탄탱고’를 자주 펼쳤다. 색이 누렇게 바랜 이 책엔 연필과 볼펜, 회색 형광펜으로 그은 밑줄과 갈겨쓴 메모가 긴 몰입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좀 더 내밀하게 고백하자면 매년 10월 첫째 주 목요일 노벨문학상 발표일마다 이 책을 가방에 담고 출근했다. 막연한 예감보다도 한 작가를 추종하는 한 작은 독자로서의 응원의 마음이기도 했다. 우연히 만난 한 권의 책은 때로 생의 바이블이 되기도 해서, 잘 알려진 신간 수백 권보다도 묵은 먼지에 뒤덮인 한 권의 책 앞에서 몸을 떠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 한국어판 표지. 2018년 5월 출간됐으며 20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대표작이다. 그의 나이 만 31세에 발표됐다. [김유태 기자]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 한국어판 표지. 2018년 5월 출간됐으며 20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대표작이다. 그의 나이 만 31세에 발표됐다. [김유태 기자]

연모하던 작가가 굵직한 문학상을 받는 순간은 늘 우연의 기쁨을 주지만,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노벨상 수상은 오래전부터 예견됐다는 점에서 사실 놀라운 사건은 아니었다. 다만 올해 노벨문학상의 ‘진정한 우연’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책을 8년간 6권 출간한 알마출판사의 뚝심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책은 소수 독자의 취향일 뿐 상업적 성공을 예견하긴 어려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계획된 음표보다도 예고 없이 불쑥 스며드는 악보 바깥의 우연한 음이 놀라운 화음으로 연결될 때, 우리는 이를 진정한 우연이라 부른다.

초판이나 다 팔렸을까 싶은 그의 소설은 한 문장이 몇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지독한 만연체, 또 “마침표는 신(神)의 일”이라는 작가 자신의 신념 탓에 구두점이 거의 없기에 진입장벽이 꽤 높다. 그뿐인가. 그의 책은 ‘검은 활자의 강’(노벨위원회 심사평)과 같아서 잠깐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흐름을 놓친다. 그런데 저 난해한 책들이 현재 주요 서점가의 종합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오른 것도 모자라 당장 구매하기도 어려운 책이 됐다. 파도 위에 머무르지 않고 표면만 즐기다 다음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처럼 얕고 신속하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세상에서, 물 아래 심연으로 잠수해 숨을 참게 만드는 이 책은 성공의 가능성을 속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알마출판사는 그 자신이 바다를 만들어냈다.

지난 9일(현지시간) 마츠 말름 노벨위원회 종신 사무총장이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를 2025년 노벨문학상 주인공으로 호명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지난 9일(현지시간) 마츠 말름 노벨위원회 종신 사무총장이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를 2025년 노벨문학상 주인공으로 호명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책의 운명은 시장이 정하는 게 아니라 그 책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어준 이들에 의해 결정된다. “부디 이 원고를 태워달라”는 친구의 유언을 듣지 않은 막스 브로트가 있었기에 우리가 카프카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언젠가 이 작가의 시간이 올 것”이란 알마출판사의 굳건했던 믿음 덕분에 우리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먼 유럽의 일’로만 치부하지 않고 세계인과 함께 누리고 있다. 즉각적 이익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 비로소 독자가 출몰하는 책이야말로 귀하다. 그런 순간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롭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이번 노벨상 수상이 작가에게 주어진 상이자 동시에 최초의 믿음을 지킨 알마출판사에 돌아간 상이라고 느끼는 이유다.

지난 주말, 다시 ‘사탄탱고’를 펼쳤다. 무수한 밑줄 가운데 한 문장을 특히 아낀다. 작중 문제적인 인물 이리미아시가 마을 주민들 앞에서 연설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펼쳐진 책과 같습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또 다른 대표작 ‘저항의 멜랑콜리’는 다음 문장으로 열린다. ‘흐르지만 흘러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리듯 흘러가기를 강요받는 세상에서, 검은 활자를 더듬고 흰 여백에 자신의 한때 감정을 기록하며 위로받고 또 부축받고 싶은 독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크러스너호르커이 소설을 읽는다는 건 이야기를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언어라는 거대한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지는 일이다.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로이터·연합뉴스]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로이터·연합뉴스]
사진설명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