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00명의 남자와 잤다.”
업무상 만난 사이였지만, 일 얘기는 길지 않았다. 목적은 애초부터 ‘이 남자를 어떻게 침대로 끌어들일까’였기 때문이다. 미혼남과 유부남을 가리지 않았고, 중년과 청년을 아울렀다. 욕망이라는 자석에 이끌린 숱한 남자들이 그녀의 ‘섹스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어중이떠중이와 불장난이 아니었다. 그녀의 리스트에는 시대의 거장이 망라돼 있었다. 아일랜드 대문호 사무엘 베케트, 현대 미술 거장 막스 에른스트, 실험 음악의 대가 존 케이지. ‘님포매니악(섹스 중독자)’이라는 별칭과 ‘아트 에딕트(예술 중독자)’라는 상찬 틈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현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페기 구겐하임 이야기다.

아메리칸 드림…대부호 구겐하임 가문
타이타닉 사고당한 아버지…막대한 유산 상속
페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구겐하임 가문에 대한 설명을 먼저 꺼내야 한다. 1800년대 당시 ‘구겐하임’을 모르는 미국인은 없었다. 은·납 광산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일군 대부호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드림 서사 대부분이 그렇듯 시작은 미약했다. 1847년 스위스 구겐하임 지역. 동네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붙인 열아홉 살 마이어는 야망을 키우며 미국으로 건너왔다. 행상으로 이곳저곳 떠돌며 억척스러운 살았다.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됐지만 여기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마이어는 콜로라도 지역에 매물로 나온 은·납 광산을 사들였다.
제대로 된 한 방이었다. 은 가격이 급등했다. 유럽에서 알고 지내던 기술자들을 데려와 납을 제련, 상품 가치를 높였다. 원자재-가공-수출까지 이어지는 수직계열화였다. 구겐하임 패밀리의 재산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1차 세계대전 무렵에 전 세계 은·구리 생산량의 80%를 차지할 정도였다. 미국과 해외에 무려 30개가 넘는 기업을 거느린 대제국이 됐다.
페기 구겐하임은 마이어의 손녀다. 페기 부친 벤저민은 아버지를 도와 광산업을 하다가 1912년 불의의 사고로 요절했다. ‘타이타닉 침몰’이었다. 부호였던 그는 구조정에 자리를 먼저 배정받았지만,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에게 기꺼이 자기 자리를 내어줬다. 페기 나이 14세 때다.
아버지라는 울타리가 사라지자 그녀는 신경 쇠약을 앓았다. 마음을 기댈 곳이 없어 자주 방황했다. 몸과 마음이 몇 차례 흔들린 끝에 길을 찾았다. ‘예술’이었다. 아버지라는 방파제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자유’를 의미하기도 했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페기는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있었다. 흥미가 가는 대로, 발걸음이 닿는 대로. 그는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보수적인 색채를 지녔던 구겐하임 패밀리와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예술가와 섹스…작가 진면목 알아보다
170여점 예술 작품 들고 나치 피해 귀향
페기는 예술의 진수를 찾고 싶었다. 프랑스 파리, 그중에서도 예술혼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곳으로 유명한 몽파르나스에 자리를 잡았다. 마르셀 뒤샹, 앙드레 브르통, 막스 에른스트 등 전위 예술가들이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으로 세상을 뒤엎고 있던 곳이다.
페기는 예술가들을 뜨겁게 사랑했고, 그만큼 크게 상처받았다. 첫 남편은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미국인 작가 겸 조각가 로런스 베일. 그는 결혼 직후부터 페기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거친 남자였다. 두 사람은 이혼했고, 페기는 새 삶을 찾아 나섰다.
페기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게 됐다. 사랑은 덧없는 반면 쾌락은 ‘실존’했다. 자신을 절정에 오르게 하는 것만이 가치가 있었다. 그녀는 수많은 예술가와 침대에서 굴렀다. 그중 한 명이 아일랜드 대문호 사무엘 베케트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빠져들어 나흘 밤낮으로 사랑을 나눴다. 그 사랑이 너무나 격렬한 나머지, 침대 밖을 나오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짐승처럼 사랑을 나눈 뒤 허기가 질 때만 샌드위치를 사러 나왔다. 사무엘 베케트는 침실에서 페기에게 “현대 미술에 전념하라”고 조언했다. 과거 예술에 집착하는 건 창조와 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페기가 현대 미술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다. 이어 마르셀 뒤샹과 친구가 됐고, 피카소와 브랑쿠시 작품을 접했다.
예술가의 나체를 본다는 건, 본질을 꿰뚫는 것이었다. 그녀는 신진 예술가들과 거침없이 잠자리를 했고, 그들의 예술 작품을 한발 먼저 알아보고 또 사들였다. 브랑쿠시 조각 작품 ‘새’를 구매할 때는 가격을 깎기 위해 그와 자기도 했다. 그녀에게 예술과 섹스 사이에 경계선은 없었다. 새로운 예술가와 잔다는 건, 새로운 예술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나치의 군화 소리가 유럽 전역에 울려 퍼지던 1941년. 미국인이었던 페기 구겐하임은 귀향을 결심한다. 혼자가 아니었다. 나치에 위협받던 모든 예술가,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담긴 작품과 함께였다. 나치 집권기인 1939년부터 2년 동안 페기는 닥치는 대로 작품을 사들였다. 호안 미로, 칸딘스키, 마그리트, 피카소 등의 걸작 170여점 등이다. 나치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자신의 침구 사이에 작품을 껴놓기도 했다. 눈물겨운 피난길이었다. 독일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도 그녀를 따라 도미했다. 전쟁통에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도 했다. 물론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에 이혼했지만.
베네치아 궁전에 미술관 만들다
인생 자체가 초현실주의·다다이즘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해방된 여자였다.”
초현실주의가 인류가 만들어온 인습에서 탈피를 의미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사회가 부여한 도덕관념으로부터 철저한 분리를 추구했다. 그녀의 삶이 초현실주의였고, 그녀의 행동이 다다이즘이었다. 1946년 자신의 성생활을 과감히 드러낸 자서전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을 출간하기도 했다. 1000명의 남자와 잠자리하고, 7번 낙태를 한 스토리가 고스란히 담겼다.
전쟁의 포화가 멈췄지만, 페기는 논쟁을 점화했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품을 들고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향했다. 대운하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팔라초(궁전)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를 사들여 미술관으로 꾸몄다. 정원에는 남근 조각상을 놓았다.
전통과 예술의 공간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전위로 나아갔다. 전위는 처음에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종국에는 혁신으로 이어진다. 여성 컬렉터로서,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서 페기를 베네치아는 받아들이고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을 보기 위해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이 베네치아행 비행기에 탔기 때문이다. 수상 도시의 아름다움에 예술이 더해지자, 베네치아는 세계인의 유산이 됐다.
1979년 페기는 늙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혼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 혼불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건 역시 ‘구겐하임’이었다. 삼촌 솔로몬이 설립한 구겐하임 재단에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 궁전과 300점의 소장품을 기증했다. 모든 예술 작품이 안전하게 구겐하임의 품에 안긴 것을 확인한 뒤, 페기는 눈을 감았다. 현대 예술의 수호자, 혹은 정욕에 사로잡힌 미국산 마녀. 평가는 우리의 몫으로 남는다.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21호 (2025.08.06~08.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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