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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교가 곧 마주할 ‘진실의 순간’…그럴듯한 대답은 [매경포럼]

  • 김병호
  • 기사입력:2025.07.15 11:01:12
  • 최종수정:2025-07-15 11: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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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을 받아 심대한 타격을 입은 이란을 보면 안됐다는 느낌부터 든다. 세계 2위·4위 천연가스·원유 매장량, 9000만명 넘는 인구, 호르무즈 해협을 낀 지리적 위치, 페르시아 제국 후예라는 자긍심 등을 갖고도 왜 저렇게 힘들게 사는지 안타깝다.

2015년 이란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로 이란에 개방 물결이 일었을 때, 수도인 테헤란을 이듬해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젊은 택시 운전사는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다며 본인과 나라 신세를 한탄했다. 당시 27년째 집권중이던 하메네이가 이웃 나라들과 싸움만 할 뿐 국민을 위해 한 일이 없다며 물러나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이런 말을 잘못 했다간 혁명수비대에 쥐도새도 모르게 잡혀갔겠지만 택시 안에서 그는 타지에서 온 내게 감정에 북받친 듯 큰 소리를 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가운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오른쪽) [AFP = 연합뉴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가운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오른쪽) [AFP = 연합뉴스]

국제사회와 단절된 이란의 비극은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신정(神政) 체제가 등장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1925년 팔레비 왕조 수립 때부터 앞날이 불길했다. 특히 3년 전인 1922년 오스만제국이 무너진 뒤 그 곳에 술탄의 왕조 대신 대통령이 이끄는 터키공화국이 들어선 것과 대비됐다. 이 무렵이 이란과 튀르키예의 현대사적 운명을 갈라놓은 기점이라고 생각한다.

튀르키예는 정교분리와 세속주의를 내걸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반면 이란은 왕정 체제를 고수하며 전근대성을 유지했다. 팔레비 왕조 통치자인 레자 샤도 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맘(Imam)’으로 불리는 보수 성직자들의 저항으로 사회 갈등이 컸다. 왕실은 외국 기업들에 내준 자원 개발 대가를 챙기며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몰락했다. 이후 신정일치의 은둔 국가가 돼서 지금에 이르렀다.

반면 튀르키예는 카리스마 넘치는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國父)인 무스타파 케말의 주도하에 근대화와 국민통합에 속도를 냈다. 냉전 때는 전략적 요충지의 장점을 살려 동서 진영을 상대로 몸값을 높였다. 1952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으로 소련 팽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면서 서방과의 연대 속에 부흥했다. 이후 유럽행(行) 가스관 부설과 난민 유입을 막는 통로국으로서 위상을 높였다. 최근엔 우크라이나·중동 전쟁에서 중재자로도 나섰다.

국제사회 중견국인 이란과 튀르키예는 둘 다 ‘중동의 맹주’를 자처한다. 하지만 각자 외교와 통치 역량에 따라 국운이 어떻게 갈리는지 보여준다.

남북한을 보면 경제력과 각종 소프트파워 등으로 국제적 위상은 우리가 훨씬 높지만 과연 그에 걸맞는 외교력을 갖췄는지 요즘 들어 의문이다. 우리는 나토정상회의에 끝내 불참했고, 중국 전승절 행사 초청에 공식 답변을 미루고 있다. 미·중·러 눈치를 보는 형국이다. 외교 채널을 총가동해도 예전보다 불편해진 미국 측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대미 관세협상 향배는 점치기 어렵고, 한미정상회담 날짜도 미궁이다. 반면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의 친서를 거부하며 ‘외교적 밀당’을 할 정도로 요즘 북한 외교력은 역대급이다. 우리가 전화통화도 하기 힘든 러시아와의 관계는 연일 상종가다.

FILE - President of the World Bank Group Ajay Banga, from left, President of Mexico Claudia Sheinbaum, Presdent of the European Commission Ursula von der Leyen, President of France Emmanuel Macron, Britain‘s Prime Minister Keir Starmer, Canada’s Prime Minister Mark Carney, South Korean President Lee Jae-myung, President of South Africa Cyril Ramaphosa, President of Ukraine Volodymyr Zelenskyy, Prime Minister of India Narendra Modi, President of Brazil Luiz Inacio Lula da Silva and Prime Minister of Japan Shigeru Ishiba during a family photo at the G7 leaders‘ summit in Kananaskis, Alberta, Tuesday, June 17, 2025. (Stefan Rousseau/Pool Photo via AP, File) POOL PHOTO FILE PHOTO    <Copyright (c) Yonhap News Agency prohibits its content from being redistributed or reprinted without consent, and forbids the content from being learned and used by artificial intelligence systems.>
FILE - President of the World Bank Group Ajay Banga, from left, President of Mexico Claudia Sheinbaum, Presdent of the European Commission Ursula von der Leyen, President of France Emmanuel Macron, Britain‘s Prime Minister Keir Starmer, Canada’s Prime Minister Mark Carney, South Korean President Lee Jae-myung, President of South Africa Cyril Ramaphosa, President of Ukraine Volodymyr Zelenskyy, Prime Minister of India Narendra Modi, President of Brazil Luiz Inacio Lula da Silva and Prime Minister of Japan Shigeru Ishiba during a family photo at the G7 leaders‘ summit in Kananaskis, Alberta, Tuesday, June 17, 2025. (Stefan Rousseau/Pool Photo via AP, File) POOL PHOTO FILE PHOTO <Copyright (c) Yonhap News Agency prohibits its content from being redistributed or reprinted without consent, and forbids the content from being learned and used by artificial intelligence systems.>

지난달 한 세미나에서 안보 관련 전직 고위 인사는 한미정상회담이 열리면 미·중 사이에서 우리 외교의 ‘진실의 순간’이 다가올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가 이 대통령에게 중국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로서는 미·중 간 선택지를 놓고 그럴듯한 답변을 준비해둬야 할지 모른다.

이 대통령은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 참석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했지만 외교 역량은 아직 블랙박스다. 미·중과는 물론 일본 총리와도 상호 방문 일정이 아직 없다. 확정된 것은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정도인데, 우리의 다자외교 능력을 보여줄 기회다. 특히 첨예하게 대립중인 미중 간 정상회담을 우리 중재로 이끌어낼 수도 있다. APEC 회원국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불러 트럼프와 함께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를 유도해보는 외교적 상상력도 발휘해볼 수 있다.

약소국은 주변 강대국들 의중에 맞춰 살아가는 운명을 감수하기도 하지만 그들 간 경쟁의 틈새를 이용하는 묘수를 찾아낼 수도 있다. 전자는 불운한 지정학적 위치만 탓하는 숙명론이다. 하지만 그런 약점을 강점으로 바꿀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이 대통령이 강조하는 실용 외교이자 국익 증진의 길이다. 우리는 ‘주변 4강에 포위됐다’는 식의 자조적 숙명론에 갇혀 수동적 외교만 해선 안된다. 타협 불가한 우리 외교의 절대 원칙을 정해두고, 보다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을 해가야 한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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