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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동정담] '시민덕희'들의 나라

  • 박만원
  • 기사입력:2025.07.14 17:22:11
  • 최종수정:2025-07-14 18: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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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피해액이 급증하고 있다. 상반기에만 벌써 6421억원으로, 이대로 가다간 올해 처음 1조원을 넘길 전망이다. 2년 전만 해도 5000억원 아래로 떨어졌는데 다시 급증한 것은 범죄 수법이 진화한 탓이다. 가족 목소리를 감쪽같이 흉내 내 전화를 거는 딥보이스 방식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보이스피싱 피해 규모는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크다. 인구 1800만명 네덜란드는 연간 피해액이 우리나라 10분의 1도 안 된다. 차이를 가른 것은 촘촘한 예방 장치다. 한국은 실시간 이체가 일반적이고 의심 계좌로도 바로 송금이 가능하다. 반면 네덜란드는 은행과 경찰이 공동 모니터링 시스템을 운영해 이상 거래가 탐지되면 즉시 고객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낸다. 싱가포르는 모든 은행 앱에 24시간 이체 지연 기능을 도입했고, 의심 계좌는 송금이 자동으로 차단된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사기계좌 사후 추적에 의존하고 경찰과 은행, 통신사 간 실시간 정보 공유 시스템이 미흡하다. 금융거래의 자유와 신속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결과 세계 최고 수준의 핀테크 경쟁력을 갖췄지만 보이스피싱 예방 역량은 후진국과 다를 바 없다.

영화 '시민덕희'에서 보이스피싱 범인을 끝까지 추적해 잡아낸 것은 경찰이 아니라 전 재산을 빼앗긴 피해자였다. 지금도 수많은 '시민덕희'들은 허술한 예방 시스템의 희생양이 돼 사설탐정까지 고용해 범인을 쫓고 있다. 당국의 대책은 첨단기술을 활용하는 범죄조직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시작된 지 20년이 돼 가도록 대포통장, 대포폰 규제조차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면 단속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한국은 중국, 미얀마, 캄보디아 등 보이스피싱 조직 근거지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선진국이다. 돈 많은 한국인을 타깃으로 한 범죄가 활개 치기 쉬운 환경이다. 이제라도 보이스피싱에 대해 경제 안보를 위협하는 중대범죄로 규정하고 행정력과 입법 수단을 총동원해 근절에 나서야 한다.

[박만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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