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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38) 역린 | 조선의 책가도에 웬 중국 채색 자기?

  • 김소연
  • 기사입력:2025.07.11 13:56:24
  • 최종수정:2025-07-14 11: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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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차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만난 차와 관련된 이야기를 모티브로 ‘알아두면 쓸 데 많은, 재미있는’ 차 이야기를 술술 읽어나갈 수 있게 풀어낸 스토리텔링 연재물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면 매월 1회 ‘차(茶라)는 렌즈를 통해 풍성한 문화·예술·역사 이야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좋아요’와 ‘댓글’ 공유는 콘텐츠 제작과 전파에 큰 힘이 됩니다.

사진설명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조선 역사가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 많은 아쉬움을 자아내는 임금이 있다. 조선 후기 개혁 군주, 정조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암살 위협을 많이 받았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노론벽파는 당론으로 세손 제거를 내걸고 엄청나게 세손을 흔들어댔다.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이 임금이 되면 자칫 자신들의 안위에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한 때문이다.

영화 ‘역린’은 세손이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 드디어 임금이 된 이후 어느 하루의 이야기다. 세손 제거에서 ‘임금 제거’로 방향을 튼 노론들이 드디어 D-데이를 잡았다. 그날 인시(새벽3시)부터 어김없이 정조의 하루는 시작됐고, 매 시간 수많은 상징과 뒷 얘기를 담은 사건과 대화가 씨줄과 날줄을 엮어가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왕의 암살을 둘러싸고 죽여야 하는 자, 살려야 하는 자들의 엇갈린 운명의 24시간은 어떻게 수놓아질 것인가….

사진설명

역린(逆鱗)’은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가리킨다. 이 비늘을 건드리면 용이 극도로 분노해 건드린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보통 군주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 그 군주가 크게 노했을 때, ‘역린을 건드렸다’고 말한다. 정조의 역린은 당연히 ‘죄인의 아들’이라는 용어였을 터. ‘죄인의 아들’을 죽이려 나선 노론에 크게 분노한 현빈(정조 역)은 그날을 어떻게 마무리 했을까….

정조는 개혁군주로도 유명하지만 책을 즐겨 읽고 학문에 힘쓴 임금으로도 유명하다. 워낙 공부를 많이 해 ‘군사부일체’라는 단어 뜻 그대로 ‘군사’ 일체를 이룬 몇 안되는 군주로도 정평이 났다. 그런 의지를 담아 정조는 편전 어좌 뒤편에 놓아두던 일월오봉도 병풍을 책가도 병풍으로 바꿨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는 글자 뜻 그대로 해와 달, 그리고 다섯가지 봉오리가 그려진 그림이다. 오봉은 삼각산(중앙), 금강산(동쪽), 묘향산(서쪽), 지리산(남쪽), 백두산(북쪽)을 의미한다고 알려져있다. 일월오봉도에는 해와 달 외에 산, 물, 소나무 등이 함께 그려지는데 모두 십장생에 속하는 것들이다. 해는 임금, 달은 중전을 의미한다. 임금과 중전의 무병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와 번영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정조는 ‘일월오봉도’를 ‘책가도’로 바꿔

책가도(冊架圖)는 역시 글자 뜻 그대로 책이 그려진 그림이다. 조선 후기에는 책과 물건을 그리는 ‘책거리’라는 이름의 채색화가 유행했다. 그중 책장(서가)에 집중한 그림이 책가도다. 책뿐만 아니라 각종 문방구·골동품·꽃·과일 등 각종 호사스러운 기물을 함께 그렸다. 정조는 책을 사랑한 것만큼 책가도를 특히 사랑한 것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조선 시대 내내 편전 임금이 앉은 자리 뒤쪽 자리를 차지하던 일월오봉도를 내치고 책가도를 들였으랴. 왕이 사랑하는데 어찌 사대부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웬만큼 산다는 집에는 책가도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책가도에는 그 주인이 아끼는 다양한 기물과 주인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이런저런 물건들이 당연히 함께 그려졌다.

정조의 어좌 뒤로 책가도가 보인다. 장한종의 작품으로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정조의 어좌 뒤로 책가도가 보인다. 장한종의 작품으로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역사 고증을 철저하게 한 덕분일까. 영화 ‘역린’에서도 책가도를 만날 수 있다. 편전에서 신료들과 회의를 하는 장면에서 정조가 앉은 자리 뒤로 책가도가 보인다. 장한종이 그린 ‘책가문병도 8곡병’이다. 집안 대대로 궁중 화원 화가였던 장한종은 책가도를 특히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경기도박물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조선에서는 예조에 속해 있는 도화서가 왕실을 위한 그림을 전담했다. 정조는 도화서 화원 중 실력이 출중한 이들을 ‘자비령대화원’이라는 이름으로 선발해 규장각에서 일하게 했다. 일종의 정조 전담 화가였던 셈이다. 1788년 정조는 자비대령화원인 신한평(신윤복의 아버지)과 이종헌(책가도의 대가 이택균의 할아버지)에게 책가도를 그리라 명했다. 두 사람은 “궁중 화원이 무슨 책가도냐” 툴툴대며 마지못해 책가도를 그려 올렸으나 정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해괴한 그림이 있나” 대노한 정조는 둘을 귀양 보낸다. 그러곤 장한종을 새로 자비대령화원에 임명하고 그에게 책가도를 다시 그리게 했다. 그때 장한 종이 그려 올린 책가도가 바로 그 ‘역린’에 나오는 책가도다. 장한종은 책장 윗부분에 휘장을 쳤다. 휘장은 권위와 위엄을 높이기 위해 초상화에 쓰던 장치다. 책장에 휘장을 두름으로써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책가도를 원했던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책가도의 주인공은 물론 켜켜이 쌓여 있는 책이지만, 사실은 주인의 취향과 수집품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물건에 더 눈길이 간다. 요즘으로 치면 샤넬백이나 에르메스백 같은, 소장자가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물건이 당시에는 귀한 중국산 도자기와 청동기기, 안경, 나침반 등 각종 수입품이었다. 특히 다양한 도자기가 책가도 곳곳에 널려 있다.

세조 13년인 1467년 왕실이 사용하는 도자기를 독점 생산하는 ‘관요’가 경기도 광주 분원리에 세워졌다. ‘관요’는 영국으로 치면 여왕에게 납품하는 도자기에 붙던 ‘로얄’ ‘크라운’쯤 되는 셈이다. 관장하는 관청은 사옹원, 책임자는 도제조였다. 이전에는 각 지역에서 도자기를 구워 왕실에 보냈다. 그러나 각 지역에서 만든 도자기 품질이 들쭉날쭉했고 워낙 오는 길이 험해 약 5분의 1 정도만 무사하게 한양에 도착했다. 골머리를 앓던 왕실은 아예 한양 가까운 광주에 관요를 짓고 관요에서만 왕실 납품 그릇을 만들게 했다.(왕실 납품 의무가 없어진 후 지방 가마에서는 오히려 창의성 넘치는 재기발랄한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왕실에서 요구하는 그릇 대신 실험적인 그릇을 만들어보면서 충청도 철화, 전라도 덤벙, 경상도 귀얄 이도 등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백의민족’ 조선은 백자에 열광했다. 당연히 관요에서도 백자를 만들었다. 백자를 만들 수 있는 고령토와 백자에 청화 그림을 그리는 안료 ‘코발트’는 관요에서만 독점적으로 쓸 수 있게 규제했다. 물자 수급이 매양 수월하지는 않았다. 명나라가 코발트 수출을 금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각종 전란으로 조선 경제가 파탄이 나 물자를 구할 돈도 마땅치 않았다. 그뿐인가. 임진왜란 때 도공들이 대거 일본으로 잡혀가면서 조선의 도자기 산업은 일거에 몇백년 전으로 후퇴했다. 나라의 최고 도공이 모여 있는 관요에서 생산한 백자도 투박하기 그지 없었다.

관요까지 만들었지만 정작 왕실에서는 관요에서 만든 투박한 조선 그릇을 잘 쓰지 않았다. 제사 등 공식행사 때 정도만 사용했다. 평상시 사용과 장식을 위해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얇고 세련된 ‘중국산’과 심지어 ‘일본산’ 도자기를 구입했다. 특히 중전과 공주 등이 수입 도자기를 좋아했다. 왕실을 따라 양반층과 부유층도 중국산 도자기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 때도 상류층이 열광한 ‘수입품’이 있던 셈이다. ‘미제’가 아닌 ‘중국제’라는 것만 달랐을 뿐.

책가도에 상류층 열광한 중국산·일본산 수입품 빼곡
중국 영화에는 뚜껑 달린 찻잔(개완)으로 차를 마시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중국 영화에는 뚜껑 달린 찻잔(개완)으로 차를 마시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래서 책가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자기가 뚜껑이 달린 찻잔 같은 형태의 ‘개완’이다. 사대부 사이에 차 문화가 없던 조선에서는 쓸 용도가 없는 기물이었음에도 책가도에서 자주 보이는 건 개완이 그만큼 중국에서 흔한 형태의 도자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에서 녹찻잎을 넣어 우리고 뚜껑으로 녹찻잎을 뒤쪽으로 보내며 차만 마시는 식으로, 찻잔으로 사용하던 기물이다. 청나라 시대를 다룬 영화에서는 개완에 차를 마시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개완 외에 목이 긴 화병이 자주 보이는데 하나같이 투박하고 소박한 백자와는 거리가 멀다. 얄팍하고 정교하며 다양한 색깔의 안료가 덧입혀지고 심지어 그 위에 그림도 그려진 채색 자기다. 모두 ‘고아함’과는 거리가 먼 다소 ‘이상스런’ 수입 도자기다.

정갈하고 고아한 문화를 숭상한 것으로 알려졌던 조선의 민낯을 어쩌면 우리는 책가도에서 가감 없이 만나고 있는지도.

사진설명

아모레퍼시픽 조선민화전에서 만난 이택균의 책가도

지난해 12월 14일 세계 2대 미술경매 회사 크리스티에서 진행된 ‘미카 에르테군’ 컬렉션 경매가 한국인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뛰어난 조선 책가도가 한화 약 2100만~3500만원 추정가로 나왔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10분간 치열한 경합 끝에 작품은 51만 달러에 낙찰됐다. 경매 회사에 지급하는 26% 수수료까지 계산하면 최종 가격은 64만 2600달러. 이날 책가도 낙찰가는 그날 에르테군 컬렉션 경매가격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미카 에르테군이 소장했던 조선 책가도는 이택균(1808~1883 이후)의 작품이다. 이택균은 이름을 이형록(~1864)에서 이응록(~1872), 이택균(~1883년 이후)으로 여러 번 개명했다. ‘이택균의 책가도’라는 이름이 붙은 걸로 보면 1872년 이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또 이택균 시기에 바탕색이 청색인 책가도를 많이 그렸는데, 에르테군 소장품 역시 바탕색이 청색이다.

이택균은 대를 이은 궁중화원이었다. 할아버지 이종현은 자비령대화원 시절 책가도를 잘 못 그렸다는 이유로 정조가 귀양을 보낸 바로 그 화원이다. 할아버지가 귀양 간 사연이 사무쳤을까. 이택균은 궁중화원 중에서도 유독 책가도를 잘 그리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조선민화전’에서 만날 수 있는 조선 후기 궁중화원 이택균의 책가도. 짙은 파랑색 바탕이 신비롭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조선민화전’에서 만날 수 있는 조선 후기 궁중화원 이택균의 책가도. 짙은 파랑색 바탕이 신비롭다.

미카 에르테군은 루마니아 출신 디자이너이자 사교계 명사, 자선가, 컬렉터로 유명한 인물. 미국 음반회사 애틀랜틱 레코드 창업주 부인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미카 에르테군 거실 한쪽에 걸려 있던 이택균의 청색 바탕 책가도를 낙찰받은 이는 누구였을까. 개인이 아니고 아모레퍼시픽이다. 그렇게 돌고돌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이택균의 책가도는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조선민화전’에서 드디어 한국 관객들과 만났다. 병풍이 아닌 10개 폭의 패널 형태로 된 이택균 책가도는 가장 먼저 신비로운 청색 바탕이 눈길을 잡아끈다. ‘산호 가지와 공작 깃털을 꽂아 장식한 화병’ ‘3족 청동 향로’ ‘각양각색 채색자기’ 등 다양한 기물을 감상하는 재미는 덤. ‘조선민화전’은 6월 29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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