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표범이 이탈리아인들에게 국민소설이자 세계적인 명작으로 불리는 것은 귀족 사회의 몰락과 시대 변화,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깊이 있게 다뤘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신과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전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셈입니다. 시대의 큰 변곡점에서 인간 군상을 깊이 있게 조명하며 세대와 계급, 가치관의 변화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국 문학과 비교하자면 박경리 작가의 '토지'와 비슷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주인공 살리나 공작 가문의 여름 별장과 그가 다스리는 마을(영지)의 이름으로 '돈나푸가타(Donnafugata)'가 등장합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들이 머무르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주무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시칠리아에는 돈나푸가타라는 이름의 와이너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와이너리는 소설 표범보다 더 명성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물론 와인으로요. 와인 업계에서는 돈나푸가타를 아예 '시칠리아 와인의 상징이자 자존심'으로 부르기도 하는데요. 이 와이너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요.
'도망친 여인'의 전설에서 태어난 이름
돈나푸가타라는 이름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여인'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돈나(Donna)와 '도망친' '달아난'을 뜻하는 푸가타(Fugata)가 합쳐진 단어죠. 직역하면 '도망친 여인'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름은 19세기 나폴리 왕국의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가 나폴레옹의 군대를 피해 시칠리아로 피난한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했습니다. 시칠리아의 역사적 사건을 알고 있던 시칠리아인 작가가 이를 소설에 빌렸고, 소설의 유산을 계승하길 원한 시칠리아의 명망 있는 와인 양조 가문이 후에 자신들의 와인 브랜드로 사용한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현재 돈나푸가타의 핵심 포도밭이 자리한 콘테사 엔텔리나(Contessa Entellina)의 저택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돈나푸가타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와인 라벨, 그리고 와인에 담긴 스토리텔링의 근간이 됐습니다. 돈나푸가타 와인의 라벨에 그려진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리는 여인이 바로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입니다. 비운과 자유, 그리고 시칠리아의 신화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겁니다.
재밌는 것은 작가인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는 실제로 시칠리아 최남단, 튀니지와 몰타 사이 작은 섬인 람페두사를 다스리는 공작 가문(Prince of Lampedusa)의 마지막 귀족이었다는 점입니다. 시칠리아를 영지로 가진 공작 가문의 이야기인 소설 표범은 어쩌면 귀족 시대의 몰락기를 마주한 작가 본인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와이너리 이야기로 돌아와서 돈나푸가타는 1851년 설립된 1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5대에 걸쳐 가족이 경영해온 와이너리입니다. 돈나푸가타라는 브랜드 네이밍은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소설이 1958년 출간된 후 4대손인 지아코모·가브리엘라 앙카 랄로 부부가 1983년 새로 한 것입니다. 랄로 가문은 오랜 시간 동안 시칠리아 땅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며 그 정신을 와인에 담아왔습니다. 와이너리의 포도밭은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엘리미안 문명의 터전 위에 세워졌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문화 유적이기도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돈나푸가타는 지역 토착 품종의 보존과 전통 양조법의 계승에 힘써왔습니다. 일찌감치 국제 품종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를 가진 네로 다볼라, 그릴로, 프라파토 등 시칠리아 고유 품종을 중심으로 다양한 테루아에서 포도를 재배·양조합니다.
특히 가문의 와이너리가 있는 시칠리아 인근 판텔레리아섬에서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고대 알베렐로(Alberello) 방식의 재배법을 보존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전통적 농법은 와인에 시칠리아만의 개성으로 불리는 강렬한 햇살, 화산토, 바닷바람 등 토착 품종 포도에서 나타나는 풍미를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시칠리아 전역을 아우르는 포도밭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입니다. 인구만 약 470만명이 거주하고 면적은 우리나라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친 수준입니다. 면적만 넓은 게 아닙니다. 가장 높은 동부 에트나산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입니다. 높이는 해발 약 3350m에 달하는데요. 결국 시칠리아는 0m부터 3350m까지 다양한 고도를 갖춘 겁니다. 덕분에 섬 안에 산악부터 구릉, 평야, 해안, 화산 등 다양한 지형이 존재합니다.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온화하고 습합니다. 시칠리아 전체적으로는 연중 평균 일교차가 5~7도에 불과하지만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시로코(Sirocco)라는 뜨거운 바람이 한겨울에도 섬의 온도를 일시적으로 30도에 가깝게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이런 지형적 특성 덕분에 시칠리아섬 안에서는 유럽 각 지역의 특성이 모두 관찰됩니다. 돈나푸가타 와이너리는 오랫동안 시칠리아에 뿌리내린 덕분에 바다를 마주한 토양에서 언덕, 산악지대까지 다양한 포도밭을 소유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레오파드'로 재탄생
최근 돈나푸가타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레오파드'가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동명 소설 표범을 6부작 미니시리즈로 연출한 것입니다.
돈나푸가타는 넷플릭스와 공식 협업을 통해 이번 드라마 방영을 기념하는 플래그십 와인 '밀레 에 우나 노떼(Mille e Una Notte) 2021 빈티지 스페셜 에디션'을 선보였습니다. 시칠리아의 심장부 레오파드의 땅에서 자란 시칠리아 토착 포도 품종인 네로 다볼라와 국제 품종인 시라, 프티 베르도 등으로 빚은 이 한정판 와인은 시칠리아의 풍경과 역사, 그리고 변화와 전통이 교차하는 서사를 담아냅니다.
돈나푸가타의 오너이자 5대 양조자인 호세 랄로와 안토니오 랄로는 한 인터뷰에서 "와인은 문화를 담는 진정한 그릇"이라며 이번 협업을 통해 시칠리아의 심장과 영혼, 그리고 이탈리아 문화유산의 깊이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드라마 레오파드가 스크린에서 시칠리아와 시대 변화를 그려냈다면 돈나푸가타의 와인은 그 변화의 향과 맛 그리고 예술적 영감을 한 병에 담아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시칠리아의 영혼과 전설, 열정이 담긴 돈나푸가타의 미래를 기대해봅니다. Cin cin!(이탈리아어로 친근하고 가벼운 건배, 짠!)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흥미로운 와인 이야기를 재밌고 맛있게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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