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없었던 꼬마 시절에 읽을 것은 책 아니면 신문이다. 그때는 프로야구 초창기여서 스포츠면이 야구 경기 상보로 채워지곤 했다. 그걸 열심히 읽은 덕분에 삼성 라이온즈 원년 선발 라인업을 지금도 빠짐없이 댈 수 있다.
야구 중계를 안 본 지 10년도 훨씬 더 됐다. 야구에 흥미를 잃은 것은 그보다 오래인데 양준혁과 이승엽이 현역에서 은퇴할 즈음이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양과 이는 대단한 선수였지만 그들이 없다고 해서 한국 야구 수준이 하루아침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들을 내 야구 세대의 마지막이라 생각한 탓이 크다.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야구 영웅 서사시의 주인공은 이만수를 위시한 프로야구 원년 멤버들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내게 막내 삼촌뻘 되는 나이다. 세월이 흘러 내 또래인 양준혁과 이승엽마저 은퇴해 버리자 야구가 좀 싱겁게 느껴졌다. 나는 나보다 어린 선수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신문에서 읽은 것 중 기억하는 것은 또 있다. 정치인 이름이다. 관심을 두고 정치 기사를 읽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겠지만 초등학생 눈에도 얼굴 사진과 이름 석자는 들어오게 돼 있다. 그때는 신문이 국한문 혼용을 할 때여서 이름은 한자로 나왔다. 그 시절의 정치인 한자 이름을 거의 기억하는 편이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 이름을 그가 이번에 원내대표에 출마하고서야 처음 들었다. 송 원내대표는 기재부 차관을 지내고 경북 김천에서 내리 3선을 했다. 대개의 TK의원들은 프로필이 번질번질하다. 좋은 학교를 나와 1차 직장에서 출세했다. 일단 국회에 들어오면 아무 존재감 없이 재선, 3선을 한다. 공천 때 말고는 신문에 이름 한 번 안 나온다. 그러다 원내대표에 출마해서 당선되는 당에 무슨 팬덤이 생기겠나.
그런 국힘도 문제지만 신문사 논설위원을 하면서 3선 의원 이름을 처음 듣는 나도 문제다. 놀란 마음에 22대 국회의원 명부를 들춰보았다. 부산의 한 4선 의원 이름이 매우 낯설다. 여야 3선 중에 낯선 이름은 너무 많아서 세기가 귀찮다. 당연히 초·재선 중에는 한 번이라도 들어본 이름을 찾는 것이 훨씬 빠르다.
내가 정치인에 흥미를 잃은 것은 언제였을까. 초중등생 시절 내 머리에 각인된 정치인 이름은 연배로 치면 아버지 세대였다. 가령 상도동과 동교동, JP 휘하의 고참 가신들, 이만섭이나 김윤환 같은 고향 정치인들을 삼국지에 나오는 재사나 장수 이름처럼 기억했다. 그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오로지 내 기준의 한국 정치 로망 시대도 저문 듯하다.
야구와 달리 국회에는 아직 나보다 연장자가 많지만 대개는 10년 안쪽이다. 홍준표 선생이 언젠가 TV 토론에서 말한 것처럼 10년까지는 동 세대다. 야구에선 또래까지 봐 줬지만 정치는 기준점이 달라 어렵다. 조자룡, 허저, 하후돈 같은 삼국지의 맹장과 현실 정치인을 매칭시키는 유희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한국 정치의 씨알이 작아지고 있다는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가만 생각하니 세대 편견일 수 있겠다. 세대마다 기억하는 영웅시대는 제각각일 테니 말이다. 언론인 고 남재희 선생에게는 신익희, 조병옥, 유진산, 장면 등이 선수로 뛰었던 민주당 신·구파 시절이 영웅시대가 아니었을까. 내게는 물론 3김시대가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름과 얼굴을 매칭시키지 못하는 무수한 22대 의원들을 주인공 삼아 삼국지를 쓰는 세대가 없으리란 법도 없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첫 수석과 장·차관 인사를 보니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후반 사이에 태어난 또래들이 주로 임명되고 있다. 내가 이들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같이 나이가 들었다는 알량한 이유 한 가지다. 그러나 내 세대가 전 세대에 비해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조국은 그 어느 때보다 영웅의 출현에 갈급해 있다. 내 또래 그리고 10년 아래 세대에서 영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세대를 주인공으로 위대한 정치 로망이 씌어졌으면 좋겠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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