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좀 다를 줄 알았다. 기행을 일삼는 그의 행동방식이 관성의 틀을 깨고 꽉 막힌 문제에서 뜻밖의 해법을 내놓지 않을까 기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만 해도 하루만에 끝낼 수 있다고 했을 때, 각론은 없었지만 트럼프니까 뭔가 이뤄낼 것 같았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일거에 끊어버리는 원초적 방식일지라도 남들이 눈치보며 못한 일을 행동으로 옮겨 성과를 낼 것으로 봤다. 하지만 지금은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감사해하라고 윽박질렀던 기억만 남아있다.
![트럼프와 젤렌스키 [AP = 연합뉴스]](https://wimg.mk.co.kr/news/cms/202504/29/news-p.v1.20250427.c49cfa3c891440b89e551e7d9b57e10f_P1.jpg)
일시 휴전이 추진됐지만 러시아의 잇단 공세로 최종 종전까지는 가시밭길이다. 변덕스런 트럼프는 “전쟁 양측 중 한쪽이 협상을 어렵게 한다면 우리는 손떼겠다”고 했다. 폭격을 멈추지 않는 러시아에 화가 난 트럼프는 추가 제재를 위협하는 등 우왕좌왕이다. 반면 유럽은 ‘이가 없으면 잇몸’ 이라는 심경으로 미국이 전쟁에서 빠지더라도 어떻게든 버텨볼 심산이다. 우크라이나가 무너지면 유럽이 러시아의 다음 타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의욕만 앞선 트럼프 의지와는 달리 전쟁은 수렁에 빠져있다. 이럴 경우 우리가 기대했던 ‘종전 후 북러 밀착 와해’ 시나리오는 요원해진다.
크렘린은 지난 26일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을 처음 공식 인정했다. 그동안 북한군 참전 주장과 증거 영상에도 가짜 정보라며 우겼던 러시아였다. 하지만 지난해 여름 우크라이나군의 기습으로 빼앗겼던 쿠르스크 지역을 북한군 투입으로 수복에 성공하자 그 성과와 공로를 북한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이틀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파병 북한군 활약을 칭찬하며 김 위원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주민 동요를 우려해 이역만리 파병 언급을 삼갔던 북한도 러시아측 발표 내용을 하루만에 따라갔다. 조선중앙통신은 27일 “국가수반 명령에 따라 참전해 쿠르스크 해방 작전이 승리로 종결됐다”고 했다. 북러 모두 지난해 6월 체결한 동맹조약 규정에 따른 합법적 파병임을 강조했다.
시차를 둔 북러 발표에 이들 간 손발이 착착 맞는듯한 느낌이 든다. 전쟁이 가져온 북러 밀착이 우리 기대를 계속 벗어나 정점을 높여가고 있다. 최근 육해공에서 북한의 잇단 무기체계 과시에 대해 전문가들이 러시아의 기술 이전 가능성을 말하는데도 정부는 별 반응이 없다. 대북 기술 지원을 삼가라며 러시아를 향해 “레드라인 넘지 말라”던 호기있는 경고도 사라졌다. 물론 레드라인을 넘더라도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은 러시아를 자극해 북러 밀착만 가속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항 옵션이 되긴 애초 불가능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3년 9월 러시아 극동지역의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갖기 전 악수하며 인사하고 있다. [매경DB 자료사진]](https://wimg.mk.co.kr/news/cms/202504/29/news-p.v1.20250428.ed34ef9cc32a4cde88d87771be476818_P1.jpg)
이렇듯 속수무책이다 보니 이젠 트럼프가 전쟁을 빨리 끝내주기만 기다리는 듯하다. 종전이 되면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팽(烹)당하고, 한러 관계는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가를 부르면서 말이다. 하지만 북러 관계는 전쟁을 계기로 조약 문구 차원을 넘어 실전을 통해 혈맹 수준이 됐다. 전장에서 피를 함께 흘린 북한과 종전 후 척을 진다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참전 상이용사를 친인척으로 둔 다수의 러시아인들이 공감하기 힘든 일이다.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북한군은 쿠르스크에서 우리 군과 한 참호에서 어깨를 맞대고 피 흘려 싸우며 영토 해방에 큰 기여를 했다”고 했다.
한국국방연구원에 따르면 북한 역시 병력·무기 지원으로 28조7000억원 상당의 경제 효과를 얻었다. 둘 다 협력 이익이 뚜렷한데 북러 관계가 전쟁 전으로 회귀할 것이란 기대는 버리는 게 낫다. 신범식 서울대 교수는 북러가 전시(戰時) 공조를 넘어 구조화된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진입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러시아는 대북 협력을 동북아에서 힘의 균형을 조정하고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한 지정학적 자산으로 간주한다”고 했다. 러시아의 북한 손절은 중국 견제를 목표로 미·러가 협력한다는 ‘역(逆)키신저’ 구상 만큼이나 현실성이 낮다.
트럼프의 종전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고조되는 북러 밀착과 그 여파를 놓고 우리 나름의 판단과 대비를 게을리해선 안된다. 트럼프 정부 1기 때 그의 책사였던 스티브 배넌의 말을 빌리자면 트럼프를 파괴자이자 뭐든 그냥 해치우는 행동파다. 어떤 구체적인 전략을 갖고 행동을 하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 종전 노력을 포기해버릴지 모를 트럼프의 입만 보고 있어선 안된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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