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리티지(Heritage).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유산’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다. 전통을 계승해야 현재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의미가 깊은 단어다.
신세계백화점은 감히 ‘헤리티지’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통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1930년 문을 연 한국 최초 백화점으로, 벌써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최근 옛 SC제일은행 본점을 리모델링해 지난 4월 새로 개관한 부티크 전문관 이름을 ‘더 헤리티지’라고 붙인 이유도 여기 있다. 1935년에 준공된 ‘문화재’ 건물을 현대적 쇼핑·문화 공간으로 재해석해냈다.
개관 후 관심이 뜨겁긴 하지만 특정 이슈에 한정돼 있는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언론과 대중은 ‘샤넬이 건물 1·2층을 통으로 쓴다’는 소식에 온통 집중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공간 면면을 찬찬히 둘러보면 전통 문화 유산의 계승, 그야말로 ‘헤리티지’라는 이름에 걸맞다는 느낌이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전통 공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전시 공간부터 한국 차(茶)와 다과 문화를 알리는 매장, 실력 있는 공예 작가 작품을 판매하는 전통 수공예 기프트숍까지. 전통을 계승해 널리 알리고자 하는 신세계백화점의 노력이 엿보인다.


복합문화공간 된 문화재 건물
근현대 조화…50년대 명동 구경
숭례문에서 한국은행 방향으로 10분 정도를 걸어가다 보면 새하얀 자태를 자랑하는 근대 양식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치솟은 고층 빌딩 사이에서 오히려 아담한 느낌을 주는, 더 헤리티지 건물이다. 1935년 준공해 과거 SC제일은행 본점으로 사용해오던 곳이다. 1989년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신세계백화점은 해당 건물을 2015년 매입해 10년 동안 복원에 공을 들였다. 건물 외관은 물론 내부까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정교한 천장 속 꽃 문양 석고 부조, 근대 느낌을 물씬 주는 좁은 엘리베이터 홀과 계단실 화강석 마감재까지. 잠깐이나마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원형에 최대한 가깝게 되살리고자 했다. 과거 문헌과 사진 자료 등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고 30차례가 넘는 국가유산위원회 위원 자문을 받았다”며 “준공 당시와 90%가량 동일한 수준까지 복원했다”고 설명했다.
샤넬 매장이 들어선 1·2층과 현재 이용하지 않는 3층을 지나쳐 4층으로 올라가면 신세계가 복원에 얼마나 공을 기울였는지 보여주는 전시 공간이 마련돼 있다. 당시 사용했던 벽돌과 목재, 철근을 비롯해 엘리베이터 층별 안내판에 이르기까지. 복원에 쓰인 각종 건축 자재들을 유리함 안에 넣어 진열해놨다.
4층은 전체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된다. 단순히 신세계백화점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자 만든 공간은 아니다. 한국 유통 역사와 관련된 각종 수집품은 물론 명동 거리와 건물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도록 꾸민 디지털 아트웍도 있다.
한편으로 ‘명동살롱’이라는 전시 전용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올해 5월까지는 사진전이 열린다. 1950~1960년대 명동 일대를 기록한 1세대 사진가 성두경·임응식·한영수 등 작가 3인의 전시다. 과거 명동 거리 모습이 수많은 흑백 사진 속에 담겨 생생히 전달된다. 비 오는 날 트렌치코트를 입고 우산을 쓴 채 명동 거리를 걷고 있는 여성들, 입에 담배를 문 채 그들을 바라보는 양복 입은 신사, 거리를 돌아다니며 담배를 파는 교복 입은 고학생 모습 등이 담겼다.
전시장 곳곳에는 과거 미싱 기계, 오래된 주판, 낡은 목재함과 비단 같은 수집품이 놓여 있고, 가운데 대형 화면에는 과거 명동을 담은 영상이 흘러나와 지루할 틈이 없다. 전시된 사진 작품을 디지털로 영상 복원한 콘텐츠다.
5층에서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옥상 공원’도 전통의 계승이라는 철학을 자연스레 보여준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한국은행 앞 사거리 풍경은 그야말로 신구의 조화다. 근대 양식 건물인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주변으로 서울을 상징하는 수많은 고층 빌딩이 한눈에 보인다. 노후한 로드숍과 세련된 디지털 사이니지 사이로, 온갖 차량과 거리의 시민이 쉴 새 없이 오간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과거에는 은행원이나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건물 내부를 속속들이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번 더 헤리티지 개관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공공과 일반 시민에게 되돌려주는 의미도 있다”며 “샤넬 매장을 제외한 모든 공간은 시민에게 전면 개방돼 있다”고 설명했다.


전통 공예 작품, 일상 속으로
작가 협업 전시·기프트숍…‘공예 붐’
옥상 풍경을 한껏 즐기고 계단을 내려오면 5층에 마련된 ‘하우스오브신세계 헤리티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 전통 문화유산인 공예 작품을 신세계만의 현대적 안목으로 재해석한 공간이다. 이곳에선 한국 문화나 생활 양식을 담은 각종 전시가 열린다. 전통 공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장인과 작가 협업을 통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도록 꾸몄다.
개관과 함께 선보인 첫 번째 전시 이름은 ‘담아 이르다’다. 보자기를 주제로 한 다양한 수집품과 작가 작품이 공간을 수놓는다. 옥 단추를 단 보자기로 책을 감아 보관하던 옛 문화에서 영감을 얻은 김수연 작가의 ‘옥책갑 보자기’, 일상 속에서 쉽게 버려지는 ‘비닐’을 실로 만들어 각종 보자기 작품으로 다시 만든 김태연 작가, 가슴을 장식하는 코르사주를 모티브로 실크 조각보를 만들어낸 최희주 작가 작품 등이 대표적이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한국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공예 작품 전시와 공예 원데이 클래스, 워크숍 등을 진행하는 공간이다. 이제는 잊혀가는 공예 작품이 얼마나 많은 정성과 시간을 쏟아 만들어진 결과물인지를 대중에게 전하고 싶다”며 “관람에서 그치지 않고 구매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전시장 너머엔 한국 전통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매장 ‘디저트살롱’도 있다. 신세계 한식연구소에서 한국 디저트를 연구해 직접 개발한 메뉴를 소개한다. 신세계그룹 로고이기도 한 ‘동백꽃’으로 만든 발효차 ‘홍화’를 비롯해 약용차 제조법이 담긴 18세기 조선시대 서적 ‘부풍향차보’에 기반해 만든 4가지 한국 전통차를 선보였다. 잣 경단·매작과·쑥떡처럼 차와 함께 마시면 좋은 병과도 매일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 정갈한 흰색 보자기를 둘러 포장한 선물용 제품 ‘다과 세트’를 들고 다니는 방문객도 여럿이다.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맨 밑 지하 1층으로 이동하면 ‘기프트숍’이 나온다. 기프트숍 핵심 콘텐츠 역시 ‘공예’다. 신세계가 장인·작가와 협업해 선보이는 독점 상품과 자체 제작한 PB 공예품을 판매하는 곳이다. 5층 공예품 전시에 참여한 작가 일부 제품도 입점해 있다. 최근 이태원 등지를 중심으로 국내에 불어오고 있는 ‘크래프트 붐’을 발 빠르게 포착한 모습이다.
어느 평일 낮 찾은 기프트숍에는 다양한 연령대 고객이 공예품을 구경 중이었다. 정장을 빼입은 80대 노인부터 단체로 쇼핑을 온 듯한 중년 여성들, 데이트를 즐기러 나온 듯한 20대 커플까지 고객층도 다양하다. 100만원이 넘는 고가도 있지만 수저 세트 등 2만원대에 구입 가능한 제품도 있다. 다구와 접시, 금속과 유리 소재를 활용한 각종 소품, 최근 인기를 끄는 ‘액막이명태’ 같은 생활 공예품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 공예품만 있는 건 아니다. 프랑스 크리스털 ‘바카라’와 ‘라리끄’, 명품 식기 브랜드 ‘크리스토플’,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덴마크 하이엔드 오디오 ‘뱅앤올룹슨’까지 해외 유명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외국인 관광객이 전통 공예품을 선물로 많이 사가게 되면 한국의 미와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다. 국내 고객 사이에서도 기존 백화점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공예품을 구경할 수 있어 신선하다는 반응이 많다”며 “입점한 해외 브랜드 역시, 과거부터 현재까지 장인 정신을 이어오는 브랜드들을 엄선해 헤리티지라는 이름에 걸맞은 곳들로 채워넣었다”고 설명했다.
손님을 ‘귀하게’ 대하는 마음, 널리 퍼졌으면

아트앤스페이스는 2023년 신세계백화점이 야심 차게 출범한 ‘아트’ 전문 조직이다. 아트앤스페이스를 총괄하는 인물은 김경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유명 건축 사무소 서아키텍스 소장을 17년간 역임했다. 이번 하우스오브신세계 헤리티지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Q. 이번 프로젝트 목표와 비전을 소개해준다면.
A. 한국인의 삶과 생활의 지혜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국내외로 널리 알리는 것이 목표다. 핵심은 ‘위빙(Weaving)’이다. 우리말로 하면 ‘엮어 짜다’ 정도 되겠다. 전통이 주는 아름다움과 현대 재해석을 엮어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다. 준비한 전시부터 기프트숍까지 모든 공간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Q. 첫 전시 주제가 ‘보자기’라는 점이 특이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A. 보자기만큼 한국인의 유연성과 실용성을 잘 보여주는 소재가 없다. 이사나 피난철 물건을 담아 옮길 때도, 밥그릇을 덮는 멍덕으로도, 탁상보로도 쓴다. 특히 귀한 선물을 담아내는 정성 어린 포장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고객을 귀하게 모신다’는 신세계 철학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보자기 한 장이 만들어지기까지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이는지 전시를 통해 보여주면 그 ‘귀함’의 의미가 더 커질 것으로 봤다.
Q. 한국 전통 공예에 방점을 찍은 ‘기프트숍’도 인상 깊다.
A. 최근에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우리 것이 귀하다’는 인식이 생기고 있다. 수많은 공산품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 예술품을, 그것도 손으로 만든 제품에 대한 선물용 수요가 커질 것으로 본다. 진짜 소중하고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상품은 누군가의 시간과 기술, 그리고 정성과 감각이 담긴 공예품이다. 전통과 현재를 잇는 공예품을 통해 한국의 지혜가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나건웅 기자 na.kunwoo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8호 (2025.05.07~2025.05.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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