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공백 속 “신흥 시장 놓치면 큰일”
기업인들이 주도한 민간 외교 ‘성과’
인도네시아 새 정부 후 첫 교류 성사
신동빈 회장 단장 맡아 “韓기업 투자” 강조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대한민국 외교 공백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기업인이 주도한 민간 외교가 결실을 맺고 있어 주목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필두로 한 한국 경제사절단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대통령 및 고위 당국자와 만나 경제 협력 방안을 구체화했다. 경제사절단은 한국 기업의 인도네시아 투자 의지를 강조하고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한국 기업에 대한 투자와 규제 완화 검토 등 협력을 이끌어냈다. 신흥국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기업이 주도한 민간 외교가 외교 공백 위기 속에서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9일 재계에 따르면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사절단은 이날 1박2일 인도네시아 공식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단장을 맡은 신 회장은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후 곧바로 베트남으로 이동해 그룹 해외 사업을 챙긴다.
이번 사절단은 이례적으로 큰 규모로 꾸려졌다. 삼성, SK, 현대자동차, 포스코, 한화 등 국내 주요 기업 고위 임원 24명이 참여했다.
사절단은 1박2일 짧은 일정 동안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과 경제조정부, 산업부 등 인도네시아 새 정부 주요 부처 장관을 차례로 예방했다. 인도네시아경영자총협회와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체쳅 헤라완 주한 인도네시아대사 내정자 미팅까지 숨 가쁜 일정을 소화했다.
재계 관계자는 “양국 협력 강화가 절실한 시점에서 성사돼 의미가 크다”면서 “인도네시아 정부와 기업을 두루 만나 우리 기업의 투자 의지와 신뢰를 보여주려다 보니 쉴 틈 없는 바쁜 일정이었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내 기업의 강한 투자 의지를 확인하고 적극 협력하기로 화답했다. 사절단 주요 기업들은 인도네시아에 이미 총 270조루피아(약 23조원) 규모의 투자를 완료했으며 첨단 제조업, 광물 자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추가 투자를 진행할 계획임을 밝혔다.
사절단장을 맡은 신 회장은 “한국은 인도네시아가 자원 중심 경제에서 가치 창출 경제로 도약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전략적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신 회장은 롯데케미칼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 투자도 요청했다. 롯데케미칼은 인도네시아 역사상 단일 외국 기업으로는 최대 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인도네시아에 총사업비 39억달러(약 5조6000억원)를 투자해 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는 ‘라인(LINE)’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부터 연간 에틸렌(EL) 100만t, 프로필렌(PL) 52만t, 폴리프로필렌(PP) 25만t 등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할 예정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신 회장 요청에 화답했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국부펀드 ‘다난타라’가 롯데케미칼에 투자하는 방안에 대해 연구 수행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난타라는 프라보워 대통령의 경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플랫폼으로 국가 핵심 프로젝트에 200억달러(약 28조8000억원)를 투자하는 국부펀드다.

사절단은 인도네시아 정부에 규제 완화를 비롯한 투자 환경 개선도 요청했다. 2023년 한·인도네시아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을 체결한 후 현지 투자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할랄 인증 의무화, 수입 상품의 전자상거래 판매 규제 등 비관세 장벽이 여전하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한국과의 교류 확대가 경제 발전과 국민 생활을 위하는 일이라면 적극 검토하겠다”고 화답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한국 기업에 대한 투자 세금 감면, 인허가 간소화, 심사 기간 단축 등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내 기업의 강한 협력 의지를 확인하고 크게 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사절단을 위해 대통령궁에서 인도네시아 연주자들이 드라마 ‘태양의 후예’ OST를 비롯해 한국 음악을 연주하는 공연도 마련했다.
재계 관계자는 “프라보워 대통령은 한국 사절단 소속 기업 하나하나의 의견을 경청하고 특정 이슈에 대해선 배석한 장차관들에게 건건마다 현장에서 바로 물어보고 확인했다”면서 “기업인이 직접 나서 인도네시아 투자와 발전 의지를 강조하는 모습을 통해 신뢰가 돈독히 쌓였다”고 했다.
사절단장을 맡은 신 회장의 리더십이 돋보였다는 평도 나온다. 작년 10월 프라보워 대통령 취임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와 국내 기업 간 협력 강화가 필요했지만 국내는 계엄과 대통령 탄핵 등으로 외교 공백이 발생한 터였다. 신흥 시장을 놓치면 안 된다는 절박감에 기업인들이 먼저 나서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에 한경협이 기업 사절단을 꾸리면서 현지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롯데그룹에 단장직을 제안했다. 신 회장은 양국 상호 협력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제안을 선뜻 수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네시아는 경제 잠재력이 높은 국가다. 경제성장률은 지난해까지 3년 연속 5%대 이상을 기록했다. 한국과의 교역 규모는 205억달러(2024년 기준)에 달한다. 1973년 수교 당시 대비 100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인구는 2억8000만명으로 세계 4위 구모다. 향후 30년간 거대한 소비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재계 관계자는 “동남아시아 같은 젊고 성장하는 시장을 선점하는 건 한국 경제의 생존 문제”라면서 “이번 기회를 뺏기면 앞으로 신흥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크기에 기업들이 절실한 마음으로 움직였다”고 했다.
인도네시아는 니켈, 리튬 등 광물이 풍부한 자원 강국이다. 국내 기업들은 동남아 국가들과 인프라스트럭처, 방산, 배터리, 스마트시티, 에너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외교 공백 속에서 다른 나라들은 기업과 정부가 발 빠르게 인도네시아 선점을 서두르는데 우리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면서 “기업들이 직접 발 벗고 나서 한국 미래 성장동력의 기반을 다졌다는 의미가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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