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취득·자본이득세 대안…국힘 적극적
“독일 사례를 참고해 재벌 기업 상속세를 대체할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
장하준 영국 런던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난 4월 22일 국회 강연에서 한 말이다. 장 교수는 손꼽히는 진보학자다. “기업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면 안 된다”며 규제 목소리를 적잖이 내왔다. 그러나 장 교수가 기업인 족쇄로 지목하며 풀어줘야 한다고 꼬집은 게 상속세다.
장 교수는 ‘글로벌 경제 질서 변화와 대한민국 경제정책 전략’이란 주제의 국회 강연에서 “한국 기업 구조 특성상 상속세를 엄격히 적용하면 기업이 와해될 수 있다”며 “(그러면) 국민 경제에 좋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 사례를 들며 “중소기업 1세들이 자식에게 기업을 상속할 때 10년간 임직원을 해고하지 않는 등의 요건을 충족하면 상속세를 면제하는 법안이 있다. 삼성이나 현대 등 재벌 기업들은 특별법을 만들어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재벌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며 “상속세를 안 내는 대신 법인세를 일정 부분 더 내는 등의 방법을 고민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
상속세 부담에 기업 처분 사례 다수
장하준 교수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얘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 명목 최고 상속세율은 50%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일본(55%) 다음으로 높다. 1999년 45%에서 50%로 상향된 후 25년째 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최대주주가 상속받는 주식에 대해 20% 더 과세하는 ‘최대주주 할증과세’를 적용할 경우 최고세율이 60%로 뛰어오른다.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업 승계를 포기한 채 매각하거나 폐업에 나서는 기업이 적지 않다.
밀폐용기의 대명사로 통한 국내 1위 밀폐용기 업체 락앤락은 상속세 때문에 회사를 매각한 후 실적이 고꾸라진 대표 사례다. 1978년 설립된 락앤락은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 베트남, 인도 등에서 인기를 얻었다. 미국 홈쇼핑 채널에서까지 대박을 냈다. 2004년엔 중국 시장점유율 1위였다. 그러나 2017년 창업주 김준일 회장이 4000억원(매각 대금 기준)이 넘는 상속세 부담으로 회사를 사모펀드에 넘겼다. 이후 락앤락은 눈에 띄게 무너졌다. 경영권을 넘겨받은 홍콩계 사모펀드가 수익성을 앞세워 한국 공장은 물론 해외 공장까지 대부분 매각한 뒤 중국 기업에 생산을 위탁했다. 그러자 소비자들은 중국 OEM 제품 ‘락앤락’에 등을 돌렸다. 2021년 5430억원까지 찍었던 매출은 3년 만에 38% 줄었다. 2023년부터는 적자를 냈다. 결국 지난해 자진 상장폐지했다.
한국무역협회가 중소기업인 79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42.2%는 “상속세 문제 등을 이유로 가업 승계를 하지 않고 매각이나 폐업을 고려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상속세 대신 자본이득세 도입 검토
유산세 → 유산취득세 방식도 고려
국가 경쟁력을 떨어트릴 정도로 과도한 상속세를 부과하는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 38개 OECD 회원국 중 14개국은 상속세를 폐지했다. 상속 관련 세금을 부과하는 국가는 24개국이다. 이마저도 20개국은 상속세 부담이 덜한 유산취득세 방식(상속인이 상속으로 취득한 상속 재산만을 기준으로 누진세율을 적용해 과세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유산취득세는 상속인이 ‘물려받는’ 재산에 대해서만 세금을 내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물려준’ 재산 전체에 세금을 부과하는 유산세 방식을 고수하는 국가는 미국, 영국, 덴마크, 한국 4개국뿐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세율을 자랑하지만, 상속세가 한국 전체 세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2024년 국세청이 거둬들인 328조원의 세수 중 15조원대에 불과하다. 전체 세수의 4.5% 수준이다. 상속세 세수 자체는 2019년 3조원대에서 2024년 15조원대로 올라섰지만,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낮다.
재계와 학계에서는 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유산에 일괄적으로 세금을 물리는 현행 상속세를 ‘자본이득세’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자본이득세란 유산을 승계받는 시점에 세금을 물리지 않고, 해당 자산을 매각해 실제로 이익을 실현할 때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상속세와 달리 승계 기업 운영을 마칠 때까지 과세를 이연할 수 있어 세금 부담을 경감하는 효과가 크다.
캐나다는 1972년 세계 최초로 상속세를 폐지하고 자본이득세로 전환한 국가다. 자본이득을 소득에 포함해 과세한다. 50여년 전 호주에서도 상속세가 농민·소규모 사업자의 사업 승계를 어렵게 한다는 여론이 심했다. 이에 1979년 상속세를 단계적으로 폐지 후, 1985년 자본이득세를 도입했다. 스웨덴은 기업 축소·폐업에 대한 근로자의 불안감, 중산층의 노후 안정성 훼손 등이 문제가 되며 2005년 70% 세율 상속세를 폐지했다. 현재 30% 단일세율의 자본이득세로 전환했다.
임동원 한국경제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단기적으로 기업 승계에 관해서만 자본이득세를 우선 도입하는 게 합리적이다. 기업의 사업 관련 자산에 대해서만 자본이득세를 도입하면 사업 외 자산에 대해서는 상속 과세를 유지할 수 있다. (초고액 자산가 감세를 원하지 않는) 일반 국민 정서에도 부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본이득세로 전환이 어렵다면, 유산취득세로 변경한 뒤 최대주주에 대한 상속세 할증 폐지 등 개선책 도입을 고려해볼 만하다. 최대주주 상속세 할증은 대기업 최대주주가 주식을 물려줄 때 ‘경영권 프리미엄’을 고려해 과세표준 금액을 늘려 잡는 것이다. 1993년 도입돼 10∼30%로 차등 적용하다 2019년 세법 개정 후 20% 단일 할증률을 적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이지만, 실제 세금 부담은 상속 주식 시가의 60%까지 높아진다. 획일적 할증 기준을 적용해 경영권 가치에 세금을 더 물리는 나라는 선진국 중 한국뿐이다.
기재부 입법예고 들어갔지만
대선 변수, 상속세 완화할까
정부는 상속세제 개편 절차에 돌입했다. 기획재정부는 3월 19일 상속세제를 유산세 방식에서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변경하고 상속세 과세체계 합리화를 골자로 하는 ‘상속제 및 증여세법 등 관련 법률 개정안’에 대해 입법예고했다. 상속세 개편 법률안은 40일간의 입법예고를 거쳐 5월 중 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할 경우 개정 법률의 시행일로부터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정부안이 그대로 시행된다면 납세자 숨통이 트인다. 문제는 해당 법률안이 국회를 뚫을 확률이 낮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이 확정되며 정국은 조기 대선 체제로 돌입했다. 이번 시행안은 윤석열 정부에서 추진하던 안이다. 정권이 바뀐다면 국회를 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주요 변수는 차기 대권 주자의 ‘세금 정책’이다. 대선 후 들어설 정권의 정책에 따라 상속·증여세제 내용이 대거 바뀔 전망이다. 아직 유력 대선 주자들은 상속세와 관련해 ‘확고한 공약’은 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공약은 경선이 끝나고, 정당마다 후보가 정해지면 내놓는다. 아직 경선이 진행 중이라 공약집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구체적인 정책은 나오지 않았어도 그동안 후보 발언과 정치적 행보를 통해 정책 방향을 전망할 수 있다. 유력 대권 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3월 초 상속세제 개편 방향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배우자 상속세 폐지에 동의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중산층을 위한 세제 합리화에 찬성했을 뿐 ‘초부자 감세’에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는 상속세 최고세율을 현행대로 50%로 유지(최대주주 할증도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만 이 전 대표가 최근 재계와 대화를 시도하며 ‘스킨십’을 늘리고 있어 추후 정책 방향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
국민의힘 후보들은 상속세 완화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친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일찌감치 상속세 완화를 주장해왔다. “부자 감세를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상속세를 원래 취지대로 정상화하자는 것”이라며 “상속세가 조세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3%에 불과하니 국가 재정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과세표준과 공제 한도를 지난 30년간 경제 성장과 집값 상승 등을 감안해 현실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역시 상속세 완화에 적극적인 주자 중 한 명이다. 안 의원은 “상속세를 감당하기 위해 회사를 매각해야 한다면, 기업 안정성이 흔들리고, 성장 기회를 놓칠 우려가 크다. 상속세가 없는 외국으로 기업을 이전한다면 대한민국 국부가 유출되기 때문에 문제는 더 커진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논리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아예 구체적인 개편안을 내놓았다. 법인세 최고세율을 24%에서 21%로,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에서 30%로 낮추는 게 핵심이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상속세 폐지와 ‘자본이득세’ 전환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징벌 형태를 띤 현행 상속세를 OECD 평균 이하로 낮추거나 폐지하고, 자본이득세를 대안으로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명순영 기자 myoung.soonyoung@mk.co.kr, 반진욱 기자 ban.jinuk@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7호 (2025.04.30~2025.05.0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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