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일본 영화와 연극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재일교포 극작가 정의신(鄭義信.49)씨가 한국을 찾았
다.
정씨는 국내에는 주로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이 만든 영화 '피와 뼈', '달은 어
디에 떠있는가', '개 달리다' 등의 시나리오를 쓴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극작가와 연출가로도 명성이 높은 팔방미인.
1989년 동숭아트홀 개관 공연으로 올려진 연극 '천년의 고독'과 한강을 무대 삼
아 고정관념을 뛰어 넘는 스케일로 국내 연극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인어
전설'(1993년)이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런 그가 직접 쓴 연극 '행인두부의 마음'(6-8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의
연출을 맡아 오랜만에 고국 팬들 앞에 선다.
지천명을 눈앞에 둔 나이지만 아직도 소년 같은 호기심과 열정을 가슴에 품고
있는 정씨를 4일 '행인두부의 마음' 무대 제작이 한창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만났다.
모국어를 듣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말에는 서투른 탓에 그와의 대화는 통역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다.
그는 "작품 활동을 할 때 거의 대부분 한국인임을 의식한다"면서 "재일 한국인
으로서의 정체성이 작품을 더 풍성히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밝혔다.
다음은 정의신씨와의 일문일답.
--일본에서의 인기와 유명세에 비해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수줍음을 많이 탄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이 아직도 어색하다.
--성장 배경이 궁금하다.
▲충남 논산이 고향으로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와 일본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났다. 오사카 인근의 히메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히메지
성벽을 따라 형성된 꽤 큰 부락이었는데, 재일교포와 일본 하층민이 섞여 있는 곳
이었다.
어렸을 때는 한국인으로서 차별이나 차이는 별로 못 느꼈다. 대학 때 어린 시절
사귄 일본 친구로부터 '엄마한테 조선인 구역에는 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는 이야
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영화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아버지가 폐품 수집일을 하셨다. 동네 영화관의 폐품도 처리하곤 했는데,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은 영화관에 공짜로 갈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영화관을 밥 먹듯
이 드나들며 영화의 세례를 듬뿍 받았다.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가 세운 요코하
마 방송영화학교를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영화 일을 하게 됐다.
--그러면 연극은.
▲'블랙텐트'라는 극단에서 활동하는 재일교포 선배의 권유로 연극을 병행하게
됐다. 사실 젊은 시절엔 배우로도 활동했다. 외모 때문인지 주로 바보나 말더듬이
같은 아웃사이더 역할을 했지만….
--영화에서 보면 의신(義信)이라는 이름처럼 남자들끼리의 의리와 신의를 중시
여기는 것 같다. 특별한 작품 경향이 있는가.
▲공교롭게도 최양일 감독과의 영화는 주로 남자들의 의리, 신의에 관한 것이었
다. 하지만 다른 영화와 연극에서는 남녀간의 사랑, 동성애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많
이 했다. 특별히 정해 놓은 주제는 없고, 관심 범위가 넓다. 오페라, 뮤지컬 연출도
해 본 적이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행인두부의 마음'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전작과
는 약간 다른 것 같다.
▲부부의 이별 이야기다. 7년 동안 함께 살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 주인공 부부
가 성탄 전야를 마지막으로 헤어지기로 한다. 둘은 일본 사람들이 즐겨 먹는 소박한
디저트 행인두부를 앞에 두고 가슴 속에 담아뒀던 분노와 원망 등을 끄집어내며 결
국 이해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처음의 행복했던 시절이 결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에 그냥 헤어지기로 한다. 웃으면서도 눈물이 나는 색다른 정서를 경
험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은 정말 바쁜 한 해가 될 듯 하다. 우선 NHK의 신년 특집 드라마의 대본
을 맡았고, 연극도 5편이나 잡혀있다. 종전 후 브라질로 이민간 일본인의 아들이 성
장한 뒤 일본 외무성에 복수하는 이야기, 규슈 지방 탄광에 징용간 재일 한국인 이
야기, 고베 대지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등을 연극으로 만들려고한다. 또 진행 중
인 영화도 몇 편 있고….
--그렇게 많은 일이 가능한가.
▲('행인두부의 마음'의 제작자인 이혜정 중앙대 교수) 정의신씨라면 충분히 가
능하다. 술, 담배를 전혀 안하는 바른생활 사나이에다 결혼도 안했고. 작품 쓰는 게
낙인 사람이다.
ykhyun14@yna.co.kr
(서울=연합뉴스) 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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