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동은 이날 이날 지난 2013년 4월 ‘용인백옥쌀배 제19회 경기도오픈 3쿠션 전국당구대회’ 3위 이후 3년 4개월만에 시상대에 올랐다. 현장에서 그와 인터뷰를 나눴다.
▲3년 4개월만의 입상이다. 소감은.
=특별한 감동보다는 아직 ‘선수 최재동’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데 만족한다. 비록 4강에선 동궁이(강동궁)에게 패(27:40)했지만, 64강(대 김인호)에선 대회 최고 하이런(18점)도 기록했다. 이제 제 또래 선수들을 대회장에서 보기란 쉽지 않다. 간혹 출전하더라도 128강 언저리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많은 선수들이 입상을 축하하던데.
=제가 입상하면 동생들이 기뻐하더라. 하하. 동궁이(강동궁) 성원이(최성원) 정한이(허정한) 등 동생들은 2000년대 초중반 함께 국내대회, 세계대회에 출전하면서 각별해진 친구들이다. 다른 후배들도 저를 보고 인사하는데 진표(홍진표) 이후 세대는 얼굴을 잘 모르겠더라.
▲나이(55세)에 비해 선수경력(15년)은 짧은 편이다.
=원래 선수생각은 없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당구선수들의 생계가 보장된 환경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운영하던 클럽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마추어 시절부터 알게 된 정규형님(김정규 전 당구국가대표 코치) 등이 “네 실력이면 선수로 정상에 설 수 있다”면서 여러 차례 (선수를)권유했고, 결국 마흔살(2002년)에 서울당구연맹 선수로 등록했다.
▲3쿠션을 제대로 시작한 게, 선수등록 10년 전인 서른쯤이었다고.
=큐를 처음 잡은 건 스무살 때다. 친구들과 당구장에 놀러가 4구를 처음 접했다. 그리곤 1년 만에 700점이 됐다. 세리(4구 경기의 몰아치기)를 익히자 흥미를 잃었고, 그 후로 10년 가까이 당구를 접었다. 그런데 29살인 1991년, 서울 삼풍백화점에서 열린 월드컵 당구대회를 보고 제 당구열정이 되살아났다. 클루망, 브롬달 등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의 플레이가 그렇게 멋져 보이더라. 처음엔 감히 따라할 생각도 못하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 그들의 공을 쫓아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30대 대부분을 당구에 푹 빠져 살았다.
▲선수들이 등록을 권유한 이유는.
=쑥스럽지만, 30대 후반까지 ‘재야의 당구 1번’이란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재미삼아 공을 쳤는데, 전국 곳곳에 소문이 나 사람들이 “한판 붙자”며 저를 찾아오더라. 물론 이길 때가 많았다.
▲선수등록 후 첫 우승은.
=첫 번째 대회는 1회전 탈락했고, 두 번째 대회인 ‘2002 제1회 뉴코이라배’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상금은 300만원으로 기억한다. 엄청 기쁠 줄 알았지만 의외로 덤덤했다. 수많은 경기를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또 지금처럼 우승자가 언론에 크게 보도될 때도 아니지 않나. 하하.
(‘2005 후루가다 월드컵’에 출전한 최재동은 32강 아베이가 루이스(에콰도르), 16강 판 에르프(네덜란드), 8강에선 전년도 세계3쿠션선수권 챔피언 딕 야스퍼스(네덜란드)까지 세트스코어 3:1로 꺾고 4강에 진출했다. 특히 야스퍼스와의 8강 2세트에선 하이런 12점을 올리며 경기를 2이닝만에 15:0으로 끝내는 기염을 토한다. (당시 세계3쿠션대회는 5전 3승 세트제로 진행, 1세트 15점 경기) 이 성적은 고 이상천을 제외하면, 고 김경률의 ‘2010 터키 안탈리아월드컵’ 우승전까지 한국의 당구월드컵 최고성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세는 4강에서 막혔다. 8강에서 토브욘 브롬달(스웨덴)을 누르고 올라온 롤란드 포톰(벨기에)에게 거짓말처럼 세트스코어 0:3 완패를 당했다. 최재동은 당시 패인을 “이제야 밝히지만, 4강에 오르자 생애 첫 월드컵 입상을 해냈다는 안도감이 들면서 긴장이 풀렸다”고 밝혔다.)
▲세계대회에 출전하며 쌓인 친분이 있다면.
=(단호하게)없다. 영어가 부족해 경기장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과 말 섞기 쉽지 않았다. 후루가다월드컵 시상식 후에도 혼자 멀뚱히 있기 싫어 도망치듯 대회장을 나왔다. 하하. 참, 얼마전 브롬달이 김용철(DS빌리어즈 전무)씨를 통해 제 안부를 물었다고 들었다. 대회장에서 딱 두 번 마주친 사이인데... 아마 동갑이라 기억하나보다. 하하.
▲2006년을 끝으로 세계대회 출전을 멈췄다.
=매 대회마다 비행기 타는 게 힘들더라. 나중엔 잠도 오지 않더라. 잠도 체력이 있어야 잘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또 그해에 서울 역삼동에 당구클럽을 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월드컵 출전을 마치게 됐다.
▲2010년, 돌연 강원도로 적을 옮겼는데.
=20대때 2년간 정선에서 생활했는데, 그때 본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뇌리에 쏙 박혀있었다. 또 사람들도 좋고, 무엇보다 조용히 당구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아 클럽(서울 역삼동)을 처분하고 강원도행을 택했다.
▲자문을 구하러 온 선수들이 많다고.
=대부분 단편적인 조언만 해줬다. 그들도 선수들이다 보니 기술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경기 중 멘탈에 대한 노하우를 알려줬다. 간단하다. 앞서 실수를 내 공격전까지, 머리에서 빨리 지우라는 것이다. 또 잡념을 버리고 연습한대로 몸을 움직이는데만 집중하라는 등의 조언을 해줬다. 여러 선수들 중, 진표(홍진표)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원주에서 살 때, 그 먼 대전에서 매주 올라와 저를 찾았다. 일주일간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지금 이렇게 일취월장한 진표가 참 대견하다.
▲이번 ‘대한체육회장배’ 입상을 반가워할 당구팬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저를 안다면 꽤 연배가 있을 것 같은데. 하하. 우승은 7년전(2010년 11월 제3회 강화동주향배 전국오픈당구대회), 국내랭킹은 현재 34위(2일 대회당일 기준)에 불과하지만, 노장 선수도 충분히 우승, 국내랭킹 10위권 진입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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