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번째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과 일본을 향해 ‘신뢰’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이 대통령은 15일 80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가파른 남북 대결 구도 속에서 사라진 신뢰를 회복해 북한과 관계 개선을 이뤄내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밝혔다. 일본을 향해서는 과거사 문제로 신뢰를 해치는 행위를 하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뜻을 분명히 전달했다.
이날 이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과는 달리 광복절 경축사를 계기로 특별하게 이름을 붙일 만한 대북 정책 기조를 내놓지는 않았다.
북한이 이미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단절 조치를 취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우선 ‘신뢰 회복’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이날 이 대통령이 중요하게 제시한 ‘신뢰’는 일면 박근혜 정부가 제시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연상시킨다. 다만 이 대통령이 말하는 신뢰에는 구체적인 행동과 선제적 대북 유화 조치, 그리고 이를 지속하겠다는 대통령 의지가 더해졌다는 점에서 전임 정부와는 차별성이 있다.
그는 경축사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엉킨 실타래일수록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풀어야 한다”며 “먼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지금 당장 신뢰 회복과 대화 복원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새 정부가 대북전단 살포·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등의 선제 조치를 한 점을 거론했다.

이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6·15 공동선언(2000년) △10·4 선언(2007년) △판문점 선언 및 9·19 평양공동선언(2018년) 등 그동안 남북 정상이 상호 존중·신뢰 정신에 기반해 맺은 합의를 되돌아봤다. 이 대통령은 “남과 북은 원수가 아니다”며 “남과 북은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고 인정하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의 특수관계라고 우리는 정의했다”고 강했다.
그는 대선 당시 공약했던 9·19 남북군사합의에 대한 선제적·단계적 복원 의지를 재차 강조하며 신뢰를 쌓기 위한 ‘행동’을 지속하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우선 남북 간 접경지역에서의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해 남북이 합의한 ‘안전판’ 격인 9·19 군사합의부터 되살려 무력분쟁을 막고, 긴 호흡으로 한반도 평화를 구축해나가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가 9·19 군사합의에 명시된 △감시초소(GP) 시범 철수 △접경지역에서의 육상·해상·공중 군사훈련 중단 △해상완충구역 설정 등을 선제적으로 취하기에는 부담이 클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북한이 9·19 군사합의 체결 이후에도 여러 차례 합의를 위반한 데다 합의 자체의 적절성에 대한 논란도 적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군 소식통은 “정부와 군당국에서 이미 9·19 군사합의를 단계적으로 복원하기 위한 실무적인 검토를 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대북 정책을 언급하며 ‘북한’이 아닌 ‘북측’이라는 표현을 쓰며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로 규정한 것도 전임자인 윤석열 대통령 때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이날 이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마당을 같이 쓰는 우리 이웃”이라며 협력 확대에 무게를 실었다. 그는 윤 전 대통령이 지난 3년간 광복절 경축사에서 담지 않았던 ‘과거사’ 문제를 거론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한일 간 미래지향적 상생협력에 초점을 맞췄다. 오는 23일 도쿄에서 열릴 한일정상회담을 앞두고 수위를 조절한 측면도 엿보인다.

정상 간 ‘셔틀외교’ 복원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이 대통령은 “셔틀외교를 통해 자주 만나고 솔직히 대화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상생협력의 길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일본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당부했다. 그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양국 간 신뢰가 훼손되지 않게 노력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경제·안보 협력과 과거사 문제를 분리해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만들어가자는 ‘투트랙’ 기조를 분명히 한 것이다.
과거 문재인 전 대통령도 2017년 취임 첫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 같은 한일관계 투트랙 기조를 밝혔지만 방점은 과거사 문제에 찍혀 있었다. 이에 비해 이 대통령은 미래에 초점을 맞춘 대일 정책 기조를 밝혔다는 평가다.
이 대통령은 이날 경축식에서 철저하게 국익에 기반한 실용외교를 통해 120년 전 을사늑약과 같은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했다. 이 대통령은 “변화하는 정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열강 틈바구니에서 치이다 국권을 뺏겼던 120년 전 을사년의 과오를 되풀이할 수 없다”며 “2025년 을사년은 그때와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미 관세 협상은 하나의 파도에 불과하다”며 “앞으로 또 다른 파도가 시시각각 밀려올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한 걸음 뒤처지면 고단한 추격자 신세이지만 반걸음 앞서가면 무한한 기회를 누리는 선도자가 될 것”이라며 “반도체, 인공지능 등 첨단 과학기술을 육성해 변화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번 경축사를 통해 비상계엄 사태를 이겨냈던 ‘빛의 혁명’을 치켜세우며 보수 진영을 겨냥하기도 했다. 그는 “사익을 추구하는 세력은 분단을 빌미 삼아 끝없이 국론을 분열시켰다”며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국민주권을 제약한 것도 모자라 전쟁의 참화로 국민을 몰아넣으려는 무도한 시도마저 서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분열의 정치에서 탈피해 연대·상생의 정치를 함께 만들어갈 것을 이 자리를 빌려 거듭 제안하고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날 경축사에선 행사 주제를 담은 빛(19회)과 독립(14회)이라는 표현이 가장 많이 언급됐다. 이를 제외하면 평화(12회)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민주(11회), 미래(11회), 주권(7회) 등이 뒤를 이었다. 윤석열 정부에서 강조했던 자유(2회)와 통일(2회)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한편 이날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전날 평양에서 열린 ‘조국 해방의 날(광복절)’ 80주년 경축행사 연설에서 러시아와의 밀착 관계를 강조하며 내부 결속에 주력했다. 김 위원장이 8·15에 공개 연설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연설에서 “혁명을 피로써 지원하는 역사와 전통을 주추로 하고 있는 조로(북·러) 단결의 힘은 무궁하다”고 했다. 북·러 군사동맹을 부각한 반면 한국과 미국을 겨냥한 메시지는 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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