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환위기로 실직한 가장들이 대거 창업에 나서면서 전국 PC방 수는 1년 만에 2만곳을 넘어섰고, 최고급 PC와 초고속 인터넷망은 빠르게 보급됐다. 스타크래프트가 없었다면 한국의 정보기술(IT) 인프라 보급은 최소 2~3년 늦어졌을 것이다. 기업들도 이를 확인하고 과감하게 설비 투자에 나섰고, 김범수 같은 창업가들은 게임을 디딤돌 삼아 굴지의 소프트웨어 기업을 일궜다.
그렇다면 최근의 인공지능(AI) 혁명은 어떨까. 인프라 보급 속도만 놓고 보면 과거 못지않다. 3000만~4000만원을 호가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는 없어서 못 살 지경이고, 챗GPT 국내 이용자도 400만명에 육박한다. 겉보기엔 스타크래프트 열풍 못지않지만, 문제는 AI가 아직 게임처럼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만약 IT 혁명 당시 기업들만 전산 시스템 구축에 몰두하고, 일반인들이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다면 수많은 창업과 일자리 창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든 산업은 결국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 시장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야 자리 잡는다. 하지만 AI는 아직도 기업의 업무 효율화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자국산 AI 모델을 개발해도, 시장에서 이를 소비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으면 '소버린 AI'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뿐이다.
결국 AI 혁명이 한국 경제를 다시 도약시킬 수 있을지는 게임 같은 '킬러 콘텐츠'의 유무에 달려 있다. 다행히 이재명 정부 들어 AI 컨트롤타워에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기업인들이 포진했다. 하이퍼클로바, 엑사원 같은 최고의 AI 모델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그들이기에 시장의 관심이 크다. 이들의 혜안으로 기업들이 AI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규식 디지털테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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