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든·정샘물…자고 나면 ‘천억 클럽’
K뷰티 업계 지형이 급변하고 있다. 국내 화장품 시장 ‘빅2’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의 양강 구도가 흔들리고 있다. 다크호스는 구다이글로벌이다. 구다이글로벌은 지난해 관계사 크레이버, 티르티르 등 3사를 합친 영업이익이 2496억원을 달성했다. 아모레퍼시픽(2204억원)과 LG생활건강(1582억원)을 제치고 K뷰티 업계 이익 1위에 올라선 셈이다. 최근 구다이글로벌은 추가로 기업가치 6000억원대 규모 서린컴퍼니 인수까지 추진하고 있어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과의 격차를 더욱 벌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흑수저’ 스타트업이 ‘백수저’ 대기업을 제치며 K뷰티 업계가 요동치고 있다.

세계 뷰티 기업 순위 7위. 미국 뷰티패션 전문매체 WWD가 조사한 ‘세계 100대 뷰티 기업’ 2017년 조사에서 아모레퍼시픽그룹은 7위를 기록했다. LG생활건강도 17위였다. 2023년 조사에서 두 회사는 모두 순위가 떨어졌다. LG생건 18위, 아모레는 19위로 밀려났다. 대신 후발주자가 선전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 화장품 수출액은 사상 최초로 100억달러를 돌파했다. 2020년 76억달러에서 급증했다. 지난해 기준 한국 화장품 수출액 성장률은 20%로, 프랑스(2%), 독일(2%) 등 전통적인 뷰티 강국을 압도적으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이는 K뷰티가 단순한 유행을 넘어 글로벌 뷰티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일본(-23%), 싱가포르(-11%) 등 아시아 국가 화장품 수출액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과 매우 대조적인 결과다.
K뷰티 성장은 특히 미국 시장에서 두드러진다. 과거 프랑스가 주도한 미국 화장품 수입 시장에서 K뷰티는 지난해 22%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1위로 올라섰다. 이는 프랑스(17%)를 제치고 미국 소비자들이 K뷰티를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더욱 고무적인 점은 2024년 중소기업 수출 품목 1위가 화장품으로 등극하며 K뷰티가 한국 경제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다. 과거 자동차, 반도체 등 전통적인 수출 강세 품목을 제치고 화장품이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역으로 떠올랐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K뷰티 열풍을 주도하는 것은 기존 강자가 아닌 인디 브랜드다.
구다이글로벌 계열 외에도 K뷰티 시장에서 매출 1000억원 이상을 기록한 인디 브랜드만 수십 개에 달한다.
지난해 매출 5000억원 이상을 기록한 브랜드만 에이피알(6511억원), 코스알엑스(5818억원) 등 2곳이다. 3000억원 이상인 곳은 더파운더즈, 클리오, 브이티, 구다이글로벌, 달바글로벌, 크레이버, 엘앤피코스메틱 등 수두룩하다. 특히 ‘스킨1004’로 유명한 크레이버는 2023년 매출액 798억원에서 지난해 3034억원으로 1년 만에 무려 280% 성장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신규 메가 브랜드(매출 1000억원 이상)에 이름을 올린 브랜드도 꽤 많다. 토리든(2023년 673억원 → 지난해 1860억원), 뷰티셀렉션(2023년 416억원 → 지난해 1357억원), 올리브인터내셔널(2023년 487억원 → 지난해 1109억원), 정샘물뷰티(2023년 707억원 → 지난해 1109억원) 등이다.
이렇게만 보면 ‘원래 화장품은 계속 성장 산업이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 분야, 상당히 치열한 데다 글로벌 대기업도 고전하는 곳이다.
글로벌 화장품 대기업 에스티로더는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6.4% 감소한 40억달러(약 5조8700억원)를 기록했고, 영업이익은 5억7400만달러 흑자에서 5억9000만달러 적자로 전환했다. 최근 3년 동안 매출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일본 대표 화장품 업체 시세이도 역시 지난해 최종 이익에서 1034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중국 시장의 소비 위축과 가격 경쟁 격화가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K뷰티 = 글로벌 콘텐츠’로 접근
인디 브랜드 급성장 비결은 뭘까.
공준식 글로우데이즈 대표는 “K뷰티 브랜드가 글로벌 시장의 급변하는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하면서 동시에 확실한 스타 제품을 중심으로 다양한 신제품을 신속히 내놓는 투트랙 전략을 펼친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VT의 시카 마스크팩, 달바 미스트와 선크림, 아누아 어성초 라인, 넘버즈인 마스크와 스킨케어 라인, 바이오던스의 콜라겐 마스크 등이 있다.
스피드경영 역시 강점이다. 이웅 화해 대표는 “소비자의 빠르게 변하는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신속히 마케팅 전략을 실행하는 민첩성이 인디 브랜드의 경쟁력”이라고 평가했다.
K컬처를 적극 활용하고 ‘화장품 = 글로벌 콘텐츠’로 접근한 전략도 먹혔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박진호 뷰스컴퍼니 대표는 “글로벌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콘텐츠를 중심으로 소비자와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고 글로벌 팬덤을 확보한 것이 성장의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K뷰티 업계에는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블러(Big Blur)’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제약사의 화장품 시장 진입이 눈에 띈다. 동국제약은 최근 화장품 제조사 인수를 통해 자체 ‘뷰티 생태계’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3월 22일 화장품 연구개발 및 수출 전문 제조 기업인 ‘리봄화장품’ 지분 53.7%를 307억원에 인수했다. 리봄화장품은 26개국 34곳의 거래처를 보유한 화장품 ODM 업체로, 동국제약의 글로벌 시장 진출 발판이 될 전망이다. 그뿐인가. 동국제약은 미용기기 제조사 ‘위드닉스’ 지분 50.9%도 22억원에 사들였다.
화장품 업계에서 이런 식의 크고 작은 M&A는 계속 일어나고 있다. 로레알이 ‘닥터지’로 알려진 고운세상코스메틱을 2550억원, 케이엘앤파트너스가 마녀공장을 1900억원에 인수하는 식이다.
물론 경계해야 할 점도 존재한다. 이가영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색조 화장품 부문의 글로벌 대중성 부족과 SNS 기반 마케팅의 부작용인 짝퉁(가품)과 과장된 콘텐츠가 K뷰티의 신뢰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리미엄 브랜드 확대도 숙제다. 김성운 실리콘투 대표는 “세계 100대 뷰티 기업에 아쉽게도 인디 브랜드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K뷰티가 ‘가성비’ 이미지에 머물지 않으려면 브랜드 스토리와 프리미엄 라인을 강화해 중장기적인 소비자 충성도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투자 없인 결실 없다…매출 5% R&D 투자
그간 뷰티 시장은 한국과 거리가 멀었다. 프랑스 등 유럽과 일본 중심으로 시장 트렌드가 전개됐다. 하지만 최근 흐름은 전혀 다르다. K뷰티가 글로벌 무대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K뷰티가 후발 주자 타이틀을 벗고 글로벌 톱티어로 성장하는 시나리오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비슷한 사례가 없던 것도 아니다. K뷰티 선배 격인 화장품 위탁개발생산(ODM) 부문에서 후발 주자로 시작해 전 세계 톱티어로 성장한 코스맥스가 대표적이다.
코스맥스는 2015년 이탈리아 화장품 ODM 업체 ‘인터코스’를 제치며 세계 화장품 ODM 전문 업체 중 매출 기준 1위를 차지했다. 2014년 코스맥스 매출은 4198억원으로 인터코스(4650억원)보다 10% 가까이 적었다. 하지만 2015년 이를 뒤집었다. 이후 글로벌 시장에서 화장품 ODM 매출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코스맥스 측은 공격적인 투자가 얻어낸 성과라고 설명했다. 특히 2013년 로레알그룹의 미국 오하이오주 솔론 공장 인수로 톡톡한 효과를 누렸다. 글로벌 시장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필요했던 미국 공장을 확보함과 동시에 로레알그룹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됐다. 이 밖에도 코스맥스는 인도네시아 공장도 인수, 생산능력을 끌어올렸다. 덕분에 이탈리아 인터코스와 일본 시세이도 등과 협업하던 로레알그룹은 어느새 코스맥스의 1순위 파트너사로 떠올랐다.
꾸준한 연구개발도 코스맥스의 성장 비결이다. 코스맥스 관계자는 “글로벌 확대 전략은 연구·생산·영업 등 화장품 ODM 사업의 핵심 영역 모두에 걸쳐 초격차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면서 “먼저 글로벌 1100여명 연구원이 각 국가와 문화권에 특화된 제품과 소재를 개발해 현지에 공급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고 매년 매출의 5% 이상을 꾸준히 연구개발에 재투자했다”고 밝혔다.
덕분에 코스맥스는 누적 1800개 이상의 특허를 출원하고 200여개 이상의 자체 기술 브랜딩을 확보했다. 최창원 기자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6호 (2025.04.23~2025.04.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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