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찾아온 광복에 서울 거리의 시민들은 만세를 외치고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태극기를 마음껏 흔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광복 직전까지 태극기는 일제 눈에 띄어서는 안 될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기발한 발상 하나가 사람들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장기 위에 태극 문양을 덧칠하고 건곤감리 4괘를 그렸다. 일장기를 재활용한 태극기는 그렇게 제작돼 사람들 손에 들렸다. 일제의 폭압을 이겨내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기쁨을 표출해내려는 마음이 담긴 이 태극기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복 당시의 감격을 느끼게 한다.
색 바랜 태극기 한 장을 비롯해 사진과 편지, 우표, 엽서, 증명서 등에는 그 시대의 상황과 이야기가 담겼다. '역사 컬렉터'를 자처하면서 30여 년간 수집품 1만여 점을 모은 저자는 책을 통해 개항부터 일제 강점, 광복 직후까지 평범한 사람들이 남긴 의미 있는 물품들을 이야기와 함께 전한다.
저자가 소개한 수집품은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다. 모두 옛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했던 물품이다. 사람들 손때가 묻고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는 빛도 바랜 평범한 물건이지만 여기에 역사적 맥락과 배경이 곁들여지면 수집품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지원병으로 전선에 나가기 전 경성역 군인대합실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십 년 후 다시 만날 동무'라는 문구를 적은 사진, '대일본제국 만만세'로 끝맺은 조선인 청년의 유언장에서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복잡한 생각과 마음이 느껴진다. 황국신민서사 전단지, 조선 한우 수탈을 보여주는 축우 경기대회 상장, 일제의 보통학교 교과서를 접하면서는 일제의 수탈 만행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반면 일본식 이름을 새겼다 광복 후 숨겼던 원래 이름을 뒷면에 다시 새긴 문패, 비문을 지운 황국신민서사비 앞에서 촬영한 중학생들의 단체사진, 우리말로 쓴 '상짱(상장)'을 통해 일제의 잔재를 벗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김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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