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프전,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분쟁 등 피 냄새와 포성이 가득한 격전지 50곳을 취재했고 퓰리처상까지 받은 헤지스의 질문은 하나의 근원적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전쟁은 상수(常數)인가, 변수(變數)인가? 인간의 폭력성은 전쟁의 항구적 상태를 만들어냈을까, 아니면 평화를 갈망하는 인간 사회의 비정상적 재앙이 전쟁이었던 걸까?

폭력, 갈등, 범죄, 전쟁을 연구하는 세계적 경제학자인 크리스토퍼 블랫먼의 책 '우리는 왜 싸우는가: 싸울 수밖에 없다는 착각 그리고 해법'이 번역 출간됐다. 왜 인간은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시민들의 나라인 '조국'이 다른 나라를 공격했던 이유를 게임 이론에 근거해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인간은 폭력 자체를 즐기는 존재는 아니다. 전쟁은 자국과 적국 서로에 파멸적이다. 그래서 강대국도 적국과의 협상을 선호한다. 전쟁은 예외적 선택이지, 필연적인 규칙은 아닌 것이다. 7000년 전 시작된 문명국들도 싸움에 능한 유목민들을 주기적으로 매수해 자신들의 토지가 약탈당하는 최악을 제도적으로 방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간은 무기를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섬뜩한 전쟁이 곳곳에서 벌어져 불길이 치솟았고 인간의 사지는 찢겨 나갔다. "인간은 왜 공존이 아닌 갈등을 선택해야만 했는가." 저자는 이 질문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전쟁의 동인에 대해 시공간을 종횡하며 새로운 시각을 편다.
전쟁 원인은 우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받는 유혹 때문에 발생했다. 전쟁을 선택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내집단 구성원의 희생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면 막대한 전쟁 비용과 극심한 분쟁의 고통은 무시된다는 것. 이들은 전쟁으로서 개인적 이득을 기대하고 이제 전쟁을 시작해도 된다는 유혹에 빠진다. "분쟁은 통치자에게 기회가 된다. 전쟁은 통치자에게 국고를 열어준다."

전쟁이 선택되는 또 다른 이유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이상 때문이었다. '이데올로기, 종교, 민족'은 내세에서의 고통을 수반하는 대신, 천상이나 미래에서 획득할 강력한 보상이었다. 이때 폭력은 신의 영광을 이루고자 불의를 척결하는 마지막 정의로 둔갑했다. 예루살렘이 그렇지 않던가? 성소의 지배권은 '파이'를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이단적 사상을 절멸하기 위해 무슬림과 크리스천은 수천 년 전쟁을 불사해왔다. 현생에서 미리 흘린 고통의 피는 천국의 영원을 사전 확약받는 기꺼운 십일조였다.
자국과 적국 간의 힘과 정보의 불확실성도 전쟁을 추동했다. 약한 쪽은 상대에게 자신의 군사력을 속이길 희망하는 게 일반적이다. '허세'가 성공한 경우에 기대되는 보상과 허세를 부림으로써 접전을 벌일 때의 위험을 비교하고자 약한 쪽은 힘을 과시하며 공격을 감행했다. 쉽게 말해 '떠보는' 것이다.
반대로 강한 쪽은 지나치게 많이 양보할 위험과 공격한 뒤 상대가 실제론 막강했음을 깨닫는 위험을 비교한다. 저자는 쓴다. "적국의 진정한 힘을 알아내기 위해선, 공격이 최선의 전략이 될 수 있다. 불확실성 속에서의 양보는 최선의 전략이 아닐 수 있다."
적국이 날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가능성도 개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경쟁자가 '나'를 지배할 수 있고 '나'와 경쟁자 모두 그런 가능성을 안다면, 차라리 '지금' 공격해 경쟁자의 부상을 막는 게 유리하다. 아테네와 30년 평화조약을 맺은 스파르타는 15년 만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켰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발흥과 스파르타의 두려움'을 이 전쟁의 이유로 들었다.
자, 원인을 알았으니 이 세계 모든 전쟁의 종전은 앞당겨질까?
하지만 이 책은 냉정하다. 인간에게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는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저자는 평화를 재정의한다. 현실에서의 평화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며 '긴박하면서도 비폭력적인' 대치 상태가 현실적인 평화라고 저자는 본다.
리처드 세일러,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로빈슨 등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추천을 받은 책. 원제 'Why We Fight : The Roots of War and the Paths to Peace'.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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