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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이효석문학상] '여고생 성추행범' 누명 쓴 남자가 삽을 들고 간 곳은

김남숙 '삽'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용당하고 마는 한 남자
선악에 대한 깊은 사유 이끌어

  • 김유태
  • 기사입력:2025.06.26 16:32:52
  • 최종수정:2025-06-26 20: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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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숙 소설가.  문학동네
김남숙 소설가. 문학동네
"저쪽에선 이미 합의 얘기를 꺼냈어요. 육백만 원이요."

누명을 뒤집어 쓴 사건에서, 변호사가 이렇게 말한다면? 억울함을 애써 호소했지만 "증거가 없다"며 변호사로부터 합의를 은근히 종용받는 상황.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물러날 순 없다. 합의에 응했다간 '미성년자 성추행범'으로 낙인찍힐 테니 말이다.

올해 이효석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김남숙의 단편소설 '삽'의 줄거리다.

주인공 이름은 재구,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고교생은 보미다. 학원강사 재구는 맨 앞자리에 앉아 늘 말수가 없던 보미에게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오픈 채팅에서 만난 삼십 대 남성과 성관계를 맺었는데 만나주지 않자 영상을 뿌리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멈칫했지만 '도와줄 부모조차 없다'는 얘기에 안쓰럽고 딱한 마음이 들어 남성을 만나러 간 재구. 그런데 재구는 오히려 그 남성에게 난데없이 구타를 당한다. 이후 겁에 질린 보미가 '조용한 곳에 있고 싶다'고 해서 집에 데려갔더니, 보미는 재구 집에서 추행을 당했다고 어처구니없이 다음날 신고를 해버렸다. 심지어 이날 그 남성의 폭행이 '재구의 오랜 성추행에 분개했기 때문'이란 거짓말까지 함께였다.

아뿔싸. 생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재구는 생을 지탱할 수 있을까. 학원강사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소설 '삽'은 함부로 베푼 호의가 악의에 직면하고, 이 때문에 생의 방향성이 완전히 전환돼버린 한 인간의 표정을 보여준다. '앞뒤 안 가리고 착한 마음만 있는' '무슨 말을 해도 곧이곧대로 믿는' 재구의 선의는 어린 여학생에게 이용만 당했다. 아등바등 살았지만 결국 '허술한 인간, 한심한 인간'이 돼버린 재구는 과연 소설 속 허구일 뿐일까. 우리 주변에서도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차고 넘치지 않던가.

제목이 '삽'인 이유는 모든 의지를 상실한 재구가 삽을 구매하기 때문이다. 삽은 노동의 도구이지만 동시에 날카로운 무기도 될 수 있다. 생명의 밥을 주면서 죽음의 흉기로 바뀌기도 하는, 이중적인 물건이다. 삽은 구덩이를 판다는 점에서 심연의 비밀을 캐내려는 의지의 사물이기도 하다. 재구가 삽으로 행하려는 그 일은 결국 자기 심연을 향한 감정적 행위이기도 하다.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모든 걸 잃은 그 시간, 무고죄로 고소해도 시원찮을 판에 보미가 재구에게 전화를 건다. "선생님, 그래서 말인데, 그 새끼 한번 때리고 싶지 않으세요?"

삽을 들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재구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심사위원 심진경 평론가는 "철저하게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인식하고 그로써 분노하는, 하지만 어디에다가 화를 풀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인간을 그린 소설이다. 어그러지는 인간관계, 피해자의 정체성을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라고, 윤고은 소설가는 "누군가 사회에 놓은 덫에 빠진 인간을 그렸다. 타인이 나보다 먼저 내 약점을 파악했다고 느낄 때 엄습하는 공포를 빠른 속도감으로 그려냈다"고 평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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