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격 영입의 배경엔 수많은 발레 무용수를 길러낸 장선희 세종대 교수가 있었다. 최근 매일경제와 만난 그는 "세종대 발레 교육이 70년 역사를 이어왔는데, 이제 세은이 뜻을 펼칠 30년까지 더해 100년사를 이어가게 돼 뜻깊다"고 말했다.
장 교수 말대로 세종대는 국내 전문 발레 무용수 육성의 원조 격이다. 1963년 이화여대와 세종대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에 무용 전공이 신설되며 대학 발레 교육 70년사의 문을 열어젖혔다. 수도여자사범대가 1978년 남녀공학 세종대로 개편된 후엔 199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이 설립될 때까지 거의 유일한 남자 무용수 발굴의 산실 역할도 도맡았다. 이 시기 한국 발레의 대모로 불렸던 고 김정욱 교수(1926~2022)가 장 교수는 물론 박인자, 김복선, 손윤숙, 신무섭, 강준하 등의 무용 지도자를 길러냈다.
장 교수도 오는 8월이면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지만, 세종대의 발레 교육 역사를 일굴 후임이 있어 "든든하다"고 했다. "40년 가까이 매년 방학 기간엔 유럽에 머물며 발레 공연을 보거든요. 당연히 세은의 공연도 자주 보고, 함께 식사하며 예술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는 사이라 세종대의 제안을 전달했어요. 한국 발레계의 미래를 생각해 결단을 내려줘 고마울 뿐입니다."
장 교수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단에서 내려오며 지난 40년을 정리하는 책 출간을 준비 중이다. '발레 역사 400년, 발레 순례 40년'(가제)이다. 그는 "내게 뭔가 자랑할 게 있다면 다양한 발레 작품을 역사의 현장에서 봐왔다는 것"이라며 "지나칠 정도로 공연장 가는 게 좋았고, 지금도 오페라 극장에 앉아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1970~1980년대 영국 로열 발레단,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 등 세계적 발레단의 내한, 전설적 무용수 루돌프 누레예프의 공연 객석에도 장 교수가 있었다. 보고 싶은 공연이라면 그게 어디든, 표가 있든 없든 공연장으로 달려가 진을 치고 공연을 봤다.
장 교수는 "그렇게 경험하니 발레계 변화의 흐름이 확연하게 보였다"고 돌아봤다. 유럽 발레계에선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발레리나가 토슈즈와 튀튀(발레 치마)를 벗고 하이힐, 청바지 차림으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춤췄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같은 클래식 발레와는 다른, 현대 안무가 롤랑 프티, 모리스 베자르 등이 주목받던 때다. 장 교수는 "1990년대엔 이런 말을 하면 제자들도 대다수 받아들이지 못했고 클래식만 하고 싶어했다"며 "그래도 그때 미리 배운 제자들은 발레단에 들어간 후 컨템퍼러리 작품에서 역할을 잘 받아내 '고맙다'고 한다"며 웃었다.
이렇게 좋은 발레를 더 많은 사람이 보길 바라는 마음도 자연히 커졌다. '장선희 발레단'을 통해 클래식 대작의 핵심 부분을 보여주거나 대중음악 등을 활용한 창작 안무를 선보이며 '발레 대중화'를 시도하는 이유다. 이달 17~18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선 은퇴 전 마지막 공연이 될 '러브스토리: 사랑에 관한 일곱 개의 변주'를 선보인다. 이브 몽탕이 부른 프랑스 샹송 '고엽', 비엔나 왈츠, 헝가리 무곡 등을 접목한 새로운 소품작을 포함해 총 7개의 작품으로 구성했다. 장 교수는 "이렇게 다양하게 연출하면 발레를 처음 보는 사람도 졸지 않고 재밌어하더라"며 "이번 공연도 아나운서의 해설과 피아노·첼로 등 악기 연주를 곁들여 지루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세종대 제자들도 총출동한다. 유니버설발레단 수석 강민우가 예술감독을 맡았고, 국립발레단 수석 조연재·허서명,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이승용 등이 출연한다. 고된 해외 콩쿠르 여정을 함께하며 쌓은 추억이 많은 사이다. 예컨대 조연재가 2016년 불가리아 바르나 국제 콩쿠르 3위 입상 당시엔 현지에서 맞는 토슈즈를 구하기 어려워 장 교수가 한국에 있던 지인을 동원해 공수해주는 등 물심양면 지원했다고 한다.
그는 "은퇴 후엔 좀 더 오래 유럽에 머물면서 발레 순례 현장에서 본 무용, 건축, 음악, 회화, 패션 등 문화예술의 다양한 모습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며 "앞으로도 한국의 발레 영재들이 훌륭한 예술가로 자랄 수 있게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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