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도 민주주의도 아닐때
내전 발발 가능성 더 높아져
경제·군사 체제 흔들리고
파벌주의 정치 심해지면
언제든 위험 빠질 수 있어
내전·정치적 폭력·테러를 예측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이 분야 전문가인 저자는 2021년 1월 6일 미국 의회의사당 습격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두려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전혀 놀라지는 않았다고 한다. 수십 년 동안 탐구한 폭력 사태의 행동 양상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최선봉 국가로 여겨지는 미국조차 대선 결과를 부정하며 민주주의가 흔들릴 때 언제라도 내전이 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 바버라 F 월터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 샌디에이고) 정치학과 교수는 어떤 나라가 내전을 겪게 될지 여부를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징표는 그 나라가 민주주의를 향해 가고 있는지, 혹은 반대로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있는지 여부라고 본다. 민주주의가 그만큼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이런 중간 구간을 통과하는 나라를 아노크라시(anocracy)라고 부른다. 완전한 독재(autocracy)도, 민주주의(democracy)도 아닌 중간 상태를 가리킨다. 내전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아노크라시와 내전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2003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순식간에 변화시키려 한 결정에 그토록 비판적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라크의 대대적인 정치적 이행은 오히려 내전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높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에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한 나라가 험난한 이행 과정을 거치지 않고 완전한 독재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로 옮겨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심각하게 분열된 나라에서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민주화는 엄청난 불안정을 야기할 수 있다.
반대로 독재자 지망자가 권리와 자유를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민주주의가 오히려 쇠퇴할 수 있다. 최근 미국, 인도, 브라질을 비롯한 25개 나라가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있다. 이들도 과도적인 단계로 내전의 위험이 확 커진다.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안전장치에 해당하는 대통령에 대한 제약, 입법·사법·행정의 견제와 균형, 자유로운 언론, 정치적 경쟁 등을 무시하려 한다. 건전한 민주주의보다 일자리, 이민, 안전 등에 관한 시민들의 공포를 이용해서 지지를 확보한다.
아노크라시가 한 나라를 폭력 사태 및 내전의 위험에 빠뜨리는 이유는 2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민주화를 진행 중인 정부는 앞선 체제에 비해 정치적, 제도적, 군사적으로 허약하다. 독재자와 달리 아노크라시 지도자는 대개 반정부 세력을 진압하고 충성을 보장할 만큼 충분히 권력이 많거나 무자비하지 못하다. 이런 약점은 내전의 바탕이 된다. 참을성 없는 시민들이나 불만을 품은 군 장교들, 정치적 야심에 찬 누구든지, 새 정부에 맞서 반란을 조직할 이유와 기회를 발견하게 된다.
둘째, 민주주의 이행이 새로운 승자와 패자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독재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예전에 권리를 빼앗겼던 시민들이 새로운 권력을 얻는 반면, 한때 특권을 누렸던 사람들은 영향력 상실을 실감한다.
내전 예측 징표로 아노크라시와 함께 파벌주의가 있다. 아노크라시와 파벌주의, 두 변수만 살펴보면 내전 발발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파벌화된 정치 체제는 자유롭고 경쟁적인 체제와 억압적인 체제 중간 구간에 해당한다. 이런 나라에서는 시민들이 정당을 결성할 수 있지만, 적어도 한 당은 오로지 종족이나 종교에 기반을 둔다. 이 당이 권력을 잡으면 다른 모든 국민을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지지자 집단을 편애한다. 종족이나 종교 등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당들은 대개 비타협적이고 유연하지 않다. 그들의 정치적 착취는 지위가 격하된 패자를 만들어내며 사회 전반에 분열을 가중시킬 뿐이다.
미국인 저자가 제시한 내전을 방지할 예방책으로는 백인, 흑인, 황인을 막론하고 가장 취약한 시민들을 부양하는 노력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50년간 쇠퇴한 사회 서비스를 개선하고 인종과 종교의 구분선을 가로질러 사회 안전망과 인적 자본에 투자하고 양질의 초기 교육, 보편적 보건 의료, 최저 임금 인상 등을 우선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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