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k Beyond’ 개척”
명품 시계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브랜드가 리치몬트와 스와치, LVMH 등 명품 그룹이다. ‘바쉐론 콘스탄틴’ ‘랑에 운트 죄네’ ‘예거 르쿨트르’ ‘피아제’ ‘로저 드뷔’ ‘까르띠에’ ‘IWC’ 등이 리치몬트그룹에, ‘브레게’ ‘블랑팡’ ‘해리윈스턴’ ‘오메가’ ‘글라슈테 오리지날’ 등이 스와치그룹, ‘위블로’ ‘제니스’ ‘태그호이어’가 LVMH그룹에 소속돼 저마다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이하 AP)’는 이들 그룹에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시계 제조사다. 150년간 가족이 소유한 형태로 가업을 잇는 몇 안 되는 기업이자 현존하는 명품 시계 브랜드 중 설립자 가문이 직접 운영하는 유일한 기업이기도 하다. 명품 그룹의 든든한 뒷배는 없지만 AP의 위상은 넓고 깊다. 공방에서 제작하는 모든 시계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장인 홀로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데,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과 함께 세계 3대 시계 브랜드로 꼽히며 브랜드의 가치와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명성은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2023년 추정 매출이 26억달러(약 3조 7300억원)나 된다. 롤렉스, 까르띠에, 오메가에 이어 명품 시계 분야 전체 4위의 기록이다. 같은 해 글로벌 이커머스 플랫폼 ‘크로노24’가 발표한 ‘가격 상승률이 높은 시계 브랜드’ 순위에선 71%로 수위에 올랐다. 파텍필립(70%)과 리처드밀(56%), 롤렉스(45%)가 각각 2, 3, 4위. 다시 말해 가장 환금성이 높은 명품 시계란 의미다.
2025년 설립 150주년을 맞는 AP의 역사는 18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계 장인이던 쥘 루이 오데마(Jules-Louis Audemars·1851~1918년)와 에드워드 오귀스트 피게(Edward-Auguste Piguet·1853~1919년)가 의기투합해 고향인 스위스 르 브라쉬에 개점한 공방이 출발점이다. 스위스 북쪽 쥐라 산맥에 자리한 이 지역은 명품 시계의 중심지라 불리는 곳이다. 스위스 발레 드 주 지역의 천연자원 중 특히 철광석을 추출할 수 있어 스위스 시계 산업을 견인했다.
AP의 시대를 앞서간 제품은 ‘전 세계’란 수식어로 대변된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포켓 워치(1925년)를 비롯해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점프아워 시계(1921년), 시계의 내부 무브먼트를 밖으로 보이게끔 디자인한 세계 최초의 스켈레톤 시계(1934년), 세계에서 가장 얇은 손목시계 칼리버 9ML(1946년), 세계에서 가장 얇은 기계식 자동 무브먼트(1957년), 세계 최초의 셀프 와인딩 투르비용 손목시계(1986년), 100% 핸드메이드 제품 중 가장 복잡한 시계인 그랜드 소네리(1992년) 등이 주인공이다. 특히 130여 년 전인 1892년에는 소리로 분 단위까지 시간을 알리는 최초의 미닛리피터 손목시계를 제작했다. 1899년엔 시계에 일곱 가지 기능이 구현되는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회중시계로 세계를 놀라게 한다. 이 회중시계는 그랜드 및 스몰 스트라이크(소리를 내어 경과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 미닛리피터, 알람, 퍼페추얼 캘린더(일·월·요일·연도 등을 자동으로 설정하는 기능), 데드비트 세컨드(Deadbeat Second·초침이 점핑하듯 움직이는 기능), 점핑 세컨드(초침이 60초를 지날 때 크로노그래프의 분침이 정확히 한 칸을 점핑해 나타내는 기능)가 있는 크로노그래프, 스플릿 세컨드 핸드(두 개의 시간 격차를 측정할 수 있는 기능) 등의 기능이 탑재됐다. AP 측은 “전통에 대한 시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규칙을 깨는 트렌드를 선도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과 기법을 지속해서 개발하고 있다”며 “무브먼트와 케이스 부품들은 전통적인 마감 기법을 사용해 수작업으로 마감되는데, 무브먼트 장식에 드는 비용이 시계 가격의 최소 3분의 1에 해당한다”고 전했다.
AP 컬렉션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는 손목시계는 최초의 스테인리스 스틸 스포츠 시계 ‘로열 오크’다. 스위스의 명품 시계 제조사들이 스포츠 시장을 거들떠보지 않던 1972년, 로열 오크는 요트를 즐기는 귀족이나 부호 등 VIP들에게 어필하며 무대에 등장한다. 당시 대부분 금(Gold)으로 완성된 명품 시계와 달리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를 사용한 것도 희소성을 높였다. 시계 업계의 샤넬이라 인정받는 제럴드 젠타가 디자인한 로열 오크는 옥타곤(Octagon)이라 불리는 팔각형 베젤이 트레이드 마크다. AP만의 특별한 기술로 완성된 8개의 육각형 나사로 고정해 그 어떤 충격에도 절대 분해되지 않는다. 출시 이후 로열 오크는 스위스 럭셔리 스포츠 시계 시장의 약 70%를 점유하며 AP를 명품 시계의 대명사 반열에 오르게 한다.
해가 거듭되며 복잡한 시계 메커니즘과 혁신적인 기술을 장착한 로열 오크는 1993년 ‘로열 오크 오프쇼어’로 진화한다. 42㎜ 케이스를 적용해 ‘야수(The Beast)’라 불린 이 컬렉션은 당시 꽤 큰 다이얼이 회자되며 대형 시계 트렌드를 선도한다.
AP가 내세우는 ‘전통성’ ‘탁월성’ ‘과감성’ 등 3가지 핵심가 치는 스포츠 시계 외에 클래식 시계 분야에서도 유효하다. 2019년에 출시된 ‘코드 11.59 바이 오데마 피게’가 이를 대변한다. 얇은 원형 베젤과 케이스 백에 내장된 팔각형의 미들 케이스로 구성된 이 시계는 당시 미닛 리피터 슈퍼 소네리부터 투르비용, 퍼페추얼 캘린더, 셀프 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셀프 와인딩 모델에 이르는 13종이 출시됐다. 이후 AP는 컴플리케이션이 기하학적인 케이스와 기술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데 집중하며 수년에 걸쳐 그랑 소네리 카리용 슈퍼 소네리와 플라잉 투르비용 크로노 그래프 등 새로운 기술이 추가된 시계를 출시하고 있다.
AP가 최근에 출시한 컬렉션은 완전히 새로운 유색 단조 카본 소재를 사용한 43㎜의 ‘로열 오크 콘셉트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GMT 라지 데이트’다. AP의 R&D팀이 크로마 포지드 기술(Chroma Forged Technology)을 사용해 5년에 걸쳐 자체 개발한 딥 블랙 색상의 소재가 특징. 제조 공정이 현재 특허로 보호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습기, 열, 충격에 저항성이 탁월해 어떤 순간에도 어울리는 모델이다.
AP는 그 동안 극소수의 딜러를 통해 국내 시장을 공략해 왔다. 한국에 직진출한 건 2021년 8월. 국내 시장에서 매년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인 AP는 딜러 대신 직접 진출을 택하며 한국 지사를 설립했다. 현재 한국은 AP가 전세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지사를 설립한 국가다. 2024년 11월엔 서울 성수동에서 행사를 열고 한국에서의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공식 개점했다. 청담동 명품 거리에 자리한 AP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부티크, AP 하우스, 고객 서비스 센터 등 6층 규모의 복합 건물로 구성됐다. 스위스 발레드 주의 자연과 유산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디자인과 따뜻한 분위기를 적용했다. 그랜드 오프닝 행사에는 방탄소년단의 제이홉을 비롯해 배우 차은우, 박신혜, 지진희, 모델 아이린, 셰프 안성재, AP의 CEO 일라리아 레스타 등이 참석했다. 건물의 외관과 부티크는 AP의 내부 건축가가, 나머지 층은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스튜디오들과 협업으로 완성됐다. 일본과 한국의 AP를 총괄하는 프레데리크 레이스 CEO는 “이번 플래그십 스토어 개점이 한국에서 브랜드의 입지를 강화하고 고객과의 관계를 한층 더 깊게 만들기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라고 강조했다. 나인범 한국 지사장은 “2023년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 문을 연 첫 부티크를 보완하며 한국 시장에서의 향후 성장 기반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2호 (2024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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