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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춘추] 디지털 원화가 설 자리

  • 기사입력:2025.08.15 17:17:02
  • 최종수정:2025-08-15 19: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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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국회와 정부를 중심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관련 법안 발의가 이어지고, 공청회와 세미나도 잇따른다. 하지만 여전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남는다. 과연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한국에서 쓰임새가 있을까?

한때 디지털 자산은 전통 금융을 대체할 혁신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내재 가치에 대한 회의론이 커졌고, 일부 무분별한 투기로 신뢰를 잃었다.

그 와중에 스테이블코인만은 예외적으로 '쓸모 있는 자산'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테더(USDT), 서클(USDC) 같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거래와 송금, 자산 이전의 주요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 시장이 사실상 '디지털 달러' 독무대라는 점이다.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중 90% 이상이 미국 달러에 연동되고, 유로·엔·파운드 기반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통화 주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대응이란 명분 아래 정부와 정치권이 도입 논의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제도가 만들어진다고 회의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결제 인프라를 가진 한국에서, 굳이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과연 내국인 소비자들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기존 결제 수단을 대체할까.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해외 송금에서 속도와 비용의 장점이 있다 해도, 굳이 원화 기반일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도 따른다.

외국인 투자 유치 측면에서도 제약은 뚜렷하다. 현재 외국인은 국내 원화 거래소 계좌 개설 자체가 쉽지 않고, 법정화폐 원화로만 거래가 가능하다. 현행 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생겨도 그 문이 저절로 열리진 않는다.

그럼에도 이 논의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국내 금융시장 혁신의 기반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분산원장 기술을 활용한 결제·송금 인프라 혁신, 스마트 계약을 통한 자동 결제와 재무 관리 등은 단순한 디지털 자산을 넘어 실물경제와 연결되는 새로운 서비스를 열 수 있다.

또한 앞으로는 자산, 증권, 금, 부동산까지도 토큰처럼 디지털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 흐름에서 외국 자금이 디지털 자산 형태로 유입된다면, 이를 정산·관리할 수단으로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분명 의미를 가진다.

물론 리스크는 존재한다. 통화정책의 유효성 약화나 외환 시장 관리의 어려움은 현실적인 우려다. 그러나 발행 주체의 자격을 엄격히 규정하고, 준비금 관리·공시·실시간 감시 체계를 갖춘다면 초기 시행착오는 충분히 관리 가능한 위험으로 만들 수 있다.

결국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는 "지금 당장 도입할 것이냐 말 것이냐"보다 "어떤 미래를 준비할 것이냐"의 문제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다. 도입하되 철저히 준비하고, 처음부터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

"현금 없이도 사는 나라라서, 디지털 세상에 한국 돈은 없더라"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지금이 바로 원화가 제대로 설 자리를 고민해야 할 때다.

[손병두 토스인사이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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