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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민의 문화 이면] 90년대 감성

90년대 대학생이 된 X세대
사회변혁 겪은 교체기 집단
'서태지' 등은 어느새 복고
1020세대엔 레트로로 인기
K팝 축적의 과정 통해 성공
모르고 놓친 90년대 감성들
잘 해석하고 받아들인다면
K팝 논리도 더 탄탄해질 것

  • 기사입력:2025.07.18 17:23:54
  • 최종수정:2025.07.18 17: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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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나는 스무 살이 됐다. 이른바 X세대에 속한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대표되는 새로운 대중문화의 출현과 1987년을 정점으로 잦아들던 사회변혁운동이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적대시하기도 하며 뒤섞이기도 하는 기묘한 교체기였다. 지방 소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신문화의 중심지에서 벗어나 그것의 영향을 적게 받았지만 TV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자유로운 개인의 감성 표현으로부터 원천적으로 차단된 상태는 아니었다.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세대가 만들어 가는 문화에 섞여 들지 못하고 전 세대인 1980년대 문화에 흡착돼버렸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를 쓰다 보니 민중적 정서를 만나 그 강력한 흡인력에 빨려 들어갔다. 마치 '뒤로 걷기'를 하는 사람과 비슷했다. 얼굴은 전 시대로 고정하고 몸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그럼으로써 동시대의 삶과 문화는 기차를 역방향으로 타고 달릴 때처럼 좌우의 배경으로 휙휙 지나가버리는 형국이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다. 수업 과제도 원고지에 손으로 써서 냈고 동아리방에 고작 있었던 게 라디오 정도였다.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등 문예지들을 통해 X세대 문화를 비판하는 글을 먼저 읽었고, 불란서제 담론과 패스트푸드 문화에 개탄하는 지식인들의 정신에 동조했다. 유하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읽고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가서 크나큰 이질감을 느꼈고, 정태춘과 박은옥을 들으며 댓이파리가 막걸리 잔에 떨어지는 대숲 주점에서 역사와의 일체감을 회복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1990년대 문화를 다시 만나게 됐다. 그사이 우리 사회엔 레트로와 뉴트로 열풍이 불었다. 90년대 문화가 복고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젊은 세대가 20~30년 전 자신의 부모 세대의 젊은 시절을 신기하게 여기며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저때도 대단했네, 정도의 멘트를 날려준다. 그 덕분에 나도 신이 나서 밀레니얼이 재해석하고 재품평한 90년대 문화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리즈'의 호명 방식도 큰 몫을 담당했다. 아련한 배경음악과 함께 리즈 시절을 보여주는 쇼츠는 중독성도 중독성이지만, 시간 점프와 감성 전환의 마술을 부리기 때문에 여기에 푹 빠졌다가 나오면 부작용이 크다.

아무튼 이런 소비 행태엔 밀레니얼, Z세대에게 인정받았다는 아주 묘한 자존감 상승이 배경으로 깔려 있기도 하다. 10여 년 전쯤부터 우리의 선배들인 586세대가 꼰대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는 X세대인 우리가 어르신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런데 586세대와 X세대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역사와 정치의 주역으로 큰 사회적 흐름을 일궈낸 세대, X세대는 반짝 주목을 받았지만 1997년의 IMF 사태 이후로는 세대적 관심이 확 낮아져 존재감이 없어졌다. 586세대와 밀레니얼세대 사이에 낀 세대 정도로 치부됐다.

그 X세대가 지금은 50대 초반에 포진되면서 사회를 이끌어가는 연령 집단이 됐다. 집단문화와 개인문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X세대는 나쁘게 보면 자기주장이 약하고 받아먹었고 성공 경험이 적지만, 좋게 보면 주변과 잘 융화하고 개인문화를 네이티브로 장착한 첫 세대인지라 지금 세대와도 비교적 소통이 잘된다.

아무튼 90년대 문화를 요즘 자주 섭렵하고 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들은 90년대 대중예술이 보여줬던 춤 선과 멜로디, 그 안에 흐르는 정서를 다시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K팝의 성공이 한순간에 이뤄졌을 리는 없다. 세계인의 감성을 파고드는 K팝의 정신과 감성에는 과거로부터 축적돼 온 것들이 깔려 있다. 그 안에는 더 선도적인 문화의 일부를 카피해 온 것들도 있지만, 자기만의 형식과 스타일을 창조하려는 도전정신도 짙게 깔려 있다. 모든 것의 기원을 따지기 시작하면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분명 90년대 감성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저평가된 것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한 것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일 때 K팝의 내적 논리는 더욱 탄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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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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