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이 됐다. 사실상 전 세계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글로벌 관세 전쟁뿐 아니라 안보, 경제, 민주주의와 인권, 글로벌 거버넌스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혼돈과 갈등이 커지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80년간 미국의 주도로 형성됐던 국제질서의 기본 틀과 성격 자체가 바뀌는 양상이다.
특히 트럼프 2기가 일방주의와 양자주의를 우선시함에 따라 글로벌 공공재와 다자주의에 대한 미국의 리더십이 크게 후퇴하고 있다. 모든 다자기구와 국제조약 재검토 명령, 파리(기후변화) 협정 탈퇴 결정, 국제형사재판소 제재 행정명령,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유엔에서의 입장변화 등은 앞으로 나타날 수많은 사태의 예고편에 불과하다.
이러한 격동을 반영하듯이 '규범기반 국제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RBIO)'라는 국제사회의 대원칙도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짧게는 지난 20여 년간, 길게는 1945년 유엔 창설과 브레턴우즈 체제 출범 이래 RBIO와 그 유사 개념들은 국제 외교의 큰 원칙으로 자리 잡아왔다. 미국, 유럽연합(EU), G7, 일본, 호주, 싱가포르, 한국 등이 개별적으로, 또한 2022년 나토(NATO) 정상회의, 2023년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와 한·EU 정상회담에서는 공동으로 강력한 지지를 천명했다.
그런데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2월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민주주의와 법치 표현이 간략히 포함된 정도다. 반면 힘에 기반한 강대국 중심주의 경향은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전에는 중국몽과 러시아의 '강한 러시아' 정책이 이를 추동했는데 지금은 미국 스스로 자신이 주도했던 규범보다 강대국 간 거래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례적으로 유럽 평의회, EU 이사회, 유럽 의회, 영국 상원 등이 최근 연이어 RBIO에 대한 도전에 관해 치열한 토론을 하고 지지를 재확인했다. 데이비드 래미 영국 외무장관이 작년 유엔총회에서 유엔헌장과 국제규범을 위반해 '힘이 권리가 되는 세계를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강대국들을 향한 통렬한 메시지였다.
우리에게 규범 기반 국제질서는 한미동맹과 함께 평화와 번영, 세계화와 민주화에 기여한 가장 큰 외적 토대였다. 그 수혜자인 한국은 지정학적 대격변과 글로벌 리더십 부재 상황 속에서 G7 플러스를 지향하는 중견 국가답게 새 국제질서 형성 과정에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강대국 경쟁 시대에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도 G7, EU, NATO, 영국, 일본, 호주, 싱가포르 등 규범기반 국제질서를 지지하는 우방국 및 세력들과 긴밀한 연대의 축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미국의 리더십 공백을 메꾸고 지역 안정과 글로벌 거버넌스에도 긍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북한의 핵무장, 중국의 남중국해와 서해에서의 회색지대 전략에 대한 든든한 자산이 될 것이다.
둘째, 현재 유엔 안보리, 인권이사회, 각종 국제법률기구 등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이 전통적·비전통적 국제규범을 강화하는 '룰 메이커' 역할을 해야 한다. 기후변화, AI, 팬데믹 등 글로벌 거버넌스 의제에 대해 적극 기여해야 한다. 지난 1년여 동안 우리가 AI 안전정상회의, AI의 책임있는 군사적 사용에 관한 정상회의를 주최하고 이어 유엔 총회 결의를 주도하는 등 AI 시대의 글로벌 규범 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해온 것은 큰 이정표적 노력이다. 2주 전 소국이지만 규범기반 국제질서의 수호 강화에 앞장서겠다는 로런스 웡 싱가포르 총리의 연설 내용이 외교가에 회자되는 것은 국제사회의 공감대를 반영한다.
[윤병세 서울국제법연구원 이사장·군사용 AI 세계위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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