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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훈의 아그리젠토] 수상한 쌀 시장

한국은 쌀 남아도는 나라인데
전통주·가공업체선 공급 부족
정부 보유재고 더 풀면 되지만
쌀값 폭락할까 눈치보기 심해
인위적인 가격조정 부작용 커
전통주 '지역쌀 사용' 규제풀고
식품산업 키워 쌀수요 늘려야

  • 정혁훈
  • 기사입력:2025.09.01 17:40:08
  • 최종수정:2025.09.01 17:4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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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꽤 인기 있는 증류식 소주 업체 대표가 엊그제 강원도에서 연락을 해왔다. 지역 농협에서 쌀 공급 중단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가격 인상을 통보받아 걱정이라고 한 것이 불과 2주 전이었는데 아예 돈을 더 줘도 쌀을 못 살 형편이 돼버렸다. 날벼락을 맞은 이 업체는 결국 가을 햅쌀이 나올 때까지 공장 셧다운을 결정했다.

쌀 시장이 매우 수상하다. 농민들은 공급이 넘쳐 쌀값이 다시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는 반면 쌀 가공식품 업체들은 쌀을 구해달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쌀이 남아서 걱정인 나라에서 쌀을 구할 수 없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에 보관돼 있는 쌀은 수요량에 비해 절대 부족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지금 쌀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치는 건 전통주 업체와 일반 쌀 가공식품 업체들이다. 그중에서 일반 가공 업체들이 주로 사용하는 쌀은 수입쌀과 정부양곡이다. 수입쌀은 연간 40만8700t으로 정해져 있으니 논외로 하고, 지금 구하기 어렵다고 하는 쌀은 바로 정부양곡이다. 이들은 일반 쌀보다 가격이 절반 이상 싼 정부양곡으로 떡이나 떡볶이, 쌀과자, 쌀면 같은 가공식품을 만들어왔다. 즉석밥 중에도 정부양곡을 사용하는 제품이 있다.

그런데 쌀 가공식품 수요가 늘고, K푸드 수출이 증가하면서 정부양곡에 대한 수요가 이전에 비해 커지자 공급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급한 업체들은 비용 부담을 안고서라도 일반미로 정부양곡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원래 일반미를 쓰던 가공 업체들 중에서도 아예 쌀을 구하지 못하는 곳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통주 업체들이 대표적이다.

전통주 업체로 지정받는 길은 세 가지. 국가 지정 장인 혹은 식품명인이 만든 술이거나 지역 농산물로 만든 술이어야 한다. 대부분의 전통주가 바로 세 번째인 지역 특산주로서 지역 쌀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최대 50% 주세 감면 혜택을 받는다.

이들은 양조장이 위치한 시군 혹은 인접 시군에서 생산된 쌀만을 사용해야 하다 보니 해당 지역에서 쌀이 떨어지면 다른 지역에 쌀이 있어도 가져다 쓰지 못한다.

그러면 당연한 의문이 생긴다. 정부가 보관 중인 재고 쌀을 방출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현재 정부양곡 창고에는 적정 수준(80만t)을 크게 넘어서는 재고가 있어 쌀을 방출하기에 충분한 여력이 있다. 얼마 전 정부가 양곡 3만t을 시장에 풀기로 한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가공 업계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그렇다고 정부양곡을 과감하게 푸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다. 양곡 방출량을 잘못 늘렸다가 쌀값이 폭락하는 시나리오를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농협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지금 할 수 있는 대책은 쌀값이 하락하지 않는 선에서 정부양곡 방출량을 미세 조정하는 수준일 것이다. 그동안 가격 이점을 누려온 가공 업체들 중 규모가 큰 기업에는 정부양곡 대신 일반미를 구매하도록 유도해 수요를 분산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전통주 업체들에는 지역 쌀 범위를 시군에서 도 혹은 인접 도까지 늘려주는 대책도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번 사태의 근본적 원인이 쌀을 재정으로 사들여 가격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려다 벌어진 부작용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쌀의 구조적인 공급과잉을 해소하려면 가공식품 산업을 육성해 애초 시중에 남는 쌀이 없도록 쌀에 대한 수요를 확충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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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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