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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제조업 명가였던 日소니, '케데헌' 신화 쓰기까지

90년대 워크맨 시대 저물자
적자사업 과감하게 정리하고
게임·영화 등 콘텐츠에 집중
K팝 소재영화 '케데헌' 대박
日 '장인정신'도 진화하는데
韓제조업, 中맞설 변화 시급

  • 이승훈
  • 기사입력:2025.08.04 17:35:32
  • 최종수정:2025.08.04 17:3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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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뒤늦게 넷플릭스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를 접했다. '뒤늦게'라는 표현을 쓴 것은 케데헌이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많이 본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기록을 이미 세웠기 때문이다. 케데헌은 K팝 아이돌그룹 '헌트릭스'가 악령을 물리치고 노래로 세상을 보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근에는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주제곡인 '골든(GOLDEN)'이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100에서 1위에 오르는 등 많은 화제를 낳고 있다.

한류와 음악, 액션 판타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케데헌의 제작사는 일본의 소니픽처스 애니메이션이다. 케데헌은 소니에 있어 단순히 큰 흥행을 거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콘텐츠 기업 소니'의 정체성을 과감히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소니는 2000년대 이전만 해도 워크맨(음향기기)과 트리니트론(TV) 등을 통해 일본 제조업의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기업으로 군림했다. 소니의 제품에는 모두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소니의 위상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술로 빠르게 바뀌는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삼성·LG전자와 애플 등에 밀린 것이다.

대표적으로 소니의 혁신을 상징해온 워크맨은 MP3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며 세상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TV는 브라운관(CRT)에서 LCD 패널로의 변신에 늦으며 대부분의 사업을 접었다. 노트북 바이오도 이미 소니의 손을 떠났다.

하드웨어 명가의 이미지가 사라진 소니이지만 현재 일본 주식시장 시가총액 3위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이는 2010년대 들어 적자 부문인 TV와 PC 등을 과감히 정리하고 흑자 부문인 게임·음악·영화로 방향을 바꾸며 콘텐츠 기업으로 변신한 결과다.

소니의 방향타를 바꾼 인물로는 2012년부터 6년간 회사를 이끈 히라이 가즈오를 꼽을 수 있다. 소니뮤직(당시 CBS레코드)으로 입사한 경력답게 콘텐츠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았고, 이후 "소비자에게 기계가 아닌 경험을 선사하자"며 과감한 구조조정의 방향타를 잡을 수 있었다.

현재 소니 전체 매출의 60% 이상이 콘텐츠 부문에서 나온다.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을 필두로 음악과 영상, 유통까지 하나의 콘텐츠 가치사슬이 되고 있다.

이러한 소니 전략이 집결된 것이 케데헌이다. 일본 기업인데도 J팝 대신 K팝을 선택한 것은 세계 시장에서 K팝의 파급력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확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으로 글로벌 문화 흐름을 가장 정확하게 읽은 셈이기도 하다.

일본의 제조업은 그동안 '모노즈쿠리'로 불리는 장인정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았다. 워크맨과 트리니트론이 세계 시장을 호령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소니의 모노즈쿠리 덕분이다.

이제 일본의 모노즈쿠리는 단순히 물건 만들기를 넘어서 콘텐츠 만들기로 진화하고 있다. 시즈오카에서 워크맨을 만들던 엔지니어의 모노즈쿠리는 이제 LA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창작자의 손끝으로 옮겨갔다.

케데헌은 K팝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준 결과물인 동시에 소니의 모노즈쿠리가 이제는 콘텐츠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전 세계에 확인시켜준 작품이다. 중국의 거센 추격으로 제조업의 한계에 처한 우리 기업은 어떤 변신을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승훈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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