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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포럼] 숙명론 대신 창의성 필요한 韓외교

큰 잠재력에도 노선 달랐던
이란·튀르키예의 갈린 운명
韓, '주변 4강' 눈치보기 대신
APEC 계기로 강대국 중재 등
전략적 외교 역량 키워가야

  • 김병호
  • 기사입력:2025.07.14 17:20:54
  • 최종수정:2025-07-15 14:5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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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이스라엘과 미국의 대규모 공격을 받은 이란을 보면 안됐다는 생각부터 든다. 막대한 원유·가스 매장량, 9000만명이 넘는 인구, 호르무즈 해협을 낀 지리적 위치,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라는 자긍심 등을 갖고도 왜 저렇게 힘들게 사는지 안타깝다.

2015년 이란핵합의(JCPOA)로 이란에 개방 물결이 일었을 때 수도 테헤란을 이듬해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의 젊은 택시 운전사는 외국인인 내게 감정에 북받친 듯 큰소리를 냈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이웃 나라들과 싸움만 할 뿐 국민을 위해 한 일이 없다. 물러나야 한다."

국제사회와 단절된 이란의 비극은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신정(神政) 체제가 등장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1925년 팔레비 왕조 수립 때부터 앞날이 불길했다. 팔레비 왕조는 친미(親美)였지만 내부는 전근대적 통치로 인해 저항과 사회갈등이 지속됐다. 왕실은 외국에 내준 자원개발 대가를 챙기며 부패를 일삼다가 몰락했다. 이후 신정일치의 은둔 국가로 지금에 이르렀다.

반면 튀르키예에는 1922년 오스만 제국 붕괴 후 왕정이 아닌 대통령이 이끄는 터키공화국이 들어섰다. 정교분리와 세속주의를 내걸고 근대화와 국민 통합에 속도를 냈다. 냉전 때도 튀르키예는 전략적 요충지 이점을 살려 동서 진영을 상대로 몸값을 높였다. 1952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으로 소련 팽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면서 서방과의 연대 속에 부흥했다. 이후 유럽행(行) 가스관 부설과 난민 유입을 막는 통로국으로서 위상을 높였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중동 전쟁에서 중재자로도 나섰다.

이란과 튀르키예는 둘 다 '중동 맹주'를 자처하지만 외교와 통치 역량에 따라 국운이 어떻게 갈리는지 보여준다.

남북한을 보면 국제적 위상은 우리가 훨씬 높지만 그에 걸맞은 외교력을 갖췄는지 요즘 들어 의문이 든다. 나토 정상회의에 끝내 불참했고, 중국 전승절 행사 초청에 공식 답변을 미루고 있다. 미·중·러 눈치 때문이다. 외교 채널을 총가동해도 불편해진 미국 측 속내를 파악하기 힘들다. 관세협상 향배를 점치기 어렵고, 한미정상회담 날짜도 미궁이다. 반면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의 친서를 거부하며 '외교적 밀당'을 할 정도다.

최근 한 세미나에서 전직 고위 인사는 한미정상회담이 열리면 미·중 사이에서 우리 외교의 '진실의 순간'이 다가올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가 이재명 대통령에게 중국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로서는 미·중 간 선택지를 놓고 그럴듯한 답변을 준비해둬야 할지 모른다.

이 대통령은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했지만 외교 역량은 아직 블랙박스다. 오는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우리의 다자외교 능력을 보여줄 기회다. 특히 대립 중인 미·중 간 정상회담을 우리 중재로 이끌어낼 수도 있다. APEC 회원국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불러 트럼프와 함께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를 유도해보는 외교적 상상력도 발휘할 수 있다.

약소국은 주변 강대국들 의중에 맞춰 살아가는 운명을 감수할 때도 있지만 그들 간 경쟁의 틈새를 이용하는 묘수를 발휘할 수도 있다. 전자는 불운한 지정학적 위치만 탓하는 숙명론이다. 하지만 그런 약점을 강점으로 바꿀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이 대통령이 강조하는 실용 외교이자 국익 증진의 길이다. 우리는 '주변 4강에 포위됐다'는 자조적 숙명론에 갇혀 수동적 외교만 해선 안 된다. 타협 불가한 우리 외교의 절대 원칙을 정해두고, 보다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을 해가야 한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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