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빌리어드뉴스 MK빌리어드뉴스 로고

[시가 있는 월요일] 세상을 지우며

  • 김유태
  • 기사입력:2025.06.22 17:38:57
  • 최종수정:2025-06-22 23:45:4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사진설명
밤새 온 몸 기울여 이룬 시(詩)를 쉽게 지우며

세상에 지우고 싶은 것들을 생각하였다.

내가 딛고 선

마른 풀잎의 언어와 안일의 둥지를 지우고

나는 외출하였다.

골목어귀에서 만나는 찬바람의 행로를 한올 한올 지우고

바람떼에 매여오는 누운 풀잎의 얼굴들도 지우고

바라보는 하늘엔 별 하나 없이

비가 내렸다.

모든 둥지에 빗물이 고여도

사람 하나 날질 않았다. (후략)

- 강태형 '고무 지우개를 들고' 부분



오래된 책장 한구석에서 스스로 잊히길 원했던 시인의 시를 보았다.

시인은 작은 지우개 하나로 스스로를 지우려 했던 걸까. 세상엔 지워야 할 것들과 지우고 싶은 것들이 차고 넘친다.

흔적을 지우고 별을 지우고 나를 지우면 세상은 좀 더 투명해질까. 그 투명한 자리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얼굴이 다시 태어나려는 나의 의지일 순 없을까.

지우고 싶은 것들이 그 자리에서 끝없이 버티려 하는데 정작 지워져선 안 되는 것들이 자꾸만 망실돼 간다.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시인)]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