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특히 과학은 ‘알 수 없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알 수 없음’은 종교의 가장 중요한 고백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의인이자 동방 최고 부자인 욥이, 하루아침에 10자녀와 재산을 다 잃었다. 심지어 자신은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피부암에 걸려 기왓장으로 몸을 긁는 신세가 되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은 세상을 인과응보로 다스린다고 믿었다. 그들은 욥에게 닥친 불행은 그가 이전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책망하며 고해성사를 강요하였다. 그들이 욥에게 잘못을 뉘우치라고 촉구했지만, 욥은 자신의 행위에서 그 어떤 잘못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침내 등장하여 욥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내가 우주에 기초를 놓았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욥은 이제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말을 지껄였다며 깨닫고 회개한다. 손으로 입을 막고 경이롭고 신기한 눈으로 신이 창조한 세계를 관찰하겠다고 고백한다. 욥이 이 신앙을 얻기까지 고난과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이다. 그 부활은 우리의 과학이나 이성적인 논리에 기초한 사실이 아니다. 한 줌 흙으로 순간을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인간에게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일종의 깨달음이다. 충분하게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는 인생의 대원칙이다. 불가지론(不可知論), 즉 우주와 삶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진리를 인간이 알 수 없다는 이론이 유신론이나 무신론보다 인간적이다. 불가지론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의심’이다. 의심은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신약성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믿음이 소위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을 문자 그대로 신봉하는 문자무오설과 연합하여, 상식적인 신앙인들을 교회에서 몰아냈다.
그리스도교 교리 기초를 놓은 성 아구스티누스(354~430년)는 의심이 없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저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습니다(라틴어 원문: Credo ut intelligam).”
중세 스콜라 철학자인 성 안셀무스(1033~1109년)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라틴어 원문: 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문구로,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지식인의 등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란 문장으로 재조명되었어야 한다.
카라바조는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의심하는 도마’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이 그림을 통해 신앙에서 의심의 중요성을 화폭에 담았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이 로마제국의 극형인 십자가 처형으로 죽자 망연자실하였다. 예수는 과감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였다. 특히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선행이 신에게 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 종교인들, 그리고 이들에게 세뇌를 받은 유대인에게 예수는 신성모독자였다. 예수는 기득권의 삶의 기반을 흔들어버린 이단(異端)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숨었다. ‘정통 유대인들’의 폭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문을 굳게 닫고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갑자기 부활한 예수가 그들 가운데 나타나 말한다. “너희에게 평안이 깃들기를!”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입김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 “성령을 받아라!”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불어넣은 생기를 죽어가는 제자들에게 다시 불어넣었다.
다른 제자들이 의심이 많은 제자인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도마는 믿지 않았다. 못이 막혔던 상처가 난 손을 보고, 상처 난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기 전엔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후 일주일이 지나 다시 예수가 등장하였다. 예수는 “너희에게 평안이 깃들기를!”이라고 인사하고 아직도 자신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는 도마에게 말한다.
“너의 손을 가져다 내 옆구리 안으로 넣어보아라. 그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라!”
카라바조가 그린 ‘의심’과 ‘신앙’의 핵심
손끝이 닿은 자리에서 시작된 ‘믿음’
독일 포츠담 상수시 미술관에 그리스도교의 최고 덕목인 ‘의심’을 그린 카라바조의 그림이 있다. 거의 실물 크기다. 부활한 예수는 로마 병정 롱기누스가 긴 창으로 찔러 옆구리에 난 상처에 의심으로 가득한 도마의 검지 손가락을 그의 왼손으로 가져간다. 이 광경을 대머리 신사인 베드로와 요한이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카라바조는 이 네 명을 통해 의심과 신앙의 핵심을 그렸다. 배경을 검은색 천으로 가려놓고 네 명만 무대 위에 올렸다. 부활에 관한 가장 강력한 본질만 화폭에 담았다. 네 명의 얼굴이 다이아몬드 모형으로 배열되었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의심으로 가득한 제자인 도마가 마치 수술실 외과 의사가 된 것처럼, 그의 옆구리에 난 성흔에 손톱에 때가 낀 손가락을 넣은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도마를 위해 자신의 수의를 오른손으로 걷어 상처를 보여주었다. 도마는 자신의 눈으로 그의 상처를 확인하지만, 아직도 자신 앞에 있는 존재가 부활한 그리스도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것이 정말 십자가에서 창에 찔려 난 상처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스도는 그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요한복음’ 20장 2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의 손을 가져다 내 옆구리 안으로 넣어보아라.”
도마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후, 로마 병정들을 피해 다니며 길거리에서 생활하느라 옷이 다 해어졌다. 도마의 찢어진 윗옷은 바느질이 시급하다. 그가 스승을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왼손을 허리에 받치고 그리스도가 인도하는 자신의 손을 가져가는 동안 검지 손가락을 폈다. 그는 손톱에 잔뜩 때가 끼어 병균이 우글거린다는 사실조차 망각하였다. 그의 검지가 옆구리 상처를 헤집고 들어가 손가락의 삼분의 일 이상이 그리스도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이 충격적인 순간의 반응은 경악이 아니라 적막이다. 왼편으로부터 발사해온 빛이 베드로의 머리와 만나 빛을 발산한다. 그도 잔뜩 눈살을 찌푸리면서 이 성흔이 실재이며, 이 사람이 부활한 그리스도가 틀림없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한다. 그는 이분이 과연 부활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입을 벌려 숨죽여 탄식한다.
그리스도는 도마의 부검을 초연한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다. 십자가 처형으로 근육이 느슨해진 그리스도가 도마의 검지가 들어오자 살짝 놀라는 표정이다. 도마의 검지 끝과 상처 깊은 곳이 만나는 소실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어났다.
도마, 베드로, 요한은 보통 사람들이다. 얼굴은 햇빛에 거슬려 거의 붉은색이며 이마 주름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려준다. 의심을 떨쳐낸 도마의 눈은 그리스도의 성흔이 아니라 왼편으로부터 몰려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고 있다. 이 손가락은 미켈란 젤로가 시스틴 성당에 그린 하나님과 아담의 손가락을 넘어서는 너무나 인간적인 장면이다. 이 깨달음의 순간에 그리스도는 도마에게 말한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라!”

[배철현 더코라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2호 (2025.06.04~2025.06.1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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