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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칼럼] 그녀는 건배할 때 꼭 눈맞춤을 한다

의사소통의 심리학 (4) 눈맞춤(eye-contact)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 기사입력:2025.04.05 09:00:00
  • 최종수정:2025-04-07 15:2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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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의 심리학 (4) 눈맞춤(eye-contact)
사진설명

‘7년간 나쁜 섹스’를 하게 된다고, 아주 섬뜩한 경고를 했습니다. 독일 유학 시절, 파티에서 와인잔을 부딪칠 때마다 상대방 눈을 응시하지 않고 엉뚱한 곳을 보는 내게 독일 친구가 건넨 말입니다. 7년 동안 아예 섹스를 못하게 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건배할 때 눈맞춤을 강조하는 비슷한 이야기는 유럽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런 관습의 기원은 악수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악수처럼, 잔을 부딪치는 것은 내용물이 서로 섞이게 하여 독약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이때 눈을 마주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확인시켜주는 절차인 셈이지요. 일상의 위협이 사라진 오늘날, 술잔을 부딪치며 서로 눈을 맞추는 이유는 ‘함께 술 마시는 의미’를 확인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 ‘카사블랑카(Casablanca, 1942년)’라는 아주 오래된 흑백영화가 있습니다. 젊은 잉그리드 버그먼의 매력이 한껏 발휘된 전설의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한국과 일본에서 특별히 유명한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대사 때문입니다. 험프리 보가트가 잉그리드 버그먼과 잔을 부딪치며 나눈 대화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건배 장면 중 하나로 꼽힙니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 여성 가슴을 그토록 뛰게 했던 험프리 보가트의 그 유명한 대사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가 오역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어로는 ‘Here’s looking at you, kid’라는 문장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널 위해 건배, 꼬마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역을 하자면 ‘그대를 위해 건배’ 정도가 되겠지요. ‘눈동자’라는 단어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시 영화 번역자였던 다카세 시즈오가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君の瞳に乾杯)’라고 번역한 이 뜬금없는 대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명대사로 언급됩니다. 아주 멋진 오역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요.

영화 ‘카사블랑카’의 건배 장면. 험프리 보가트는 잉그리드 버그먼과 술잔을 부딪치며 “Here‘s looking at you, kid”라 말한다. 이 문장은 일본어로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로 번역되었다. 번역 역사상 가장 멋진 오역으로 꼽힌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건배 장면. 험프리 보가트는 잉그리드 버그먼과 술잔을 부딪치며 “Here‘s looking at you, kid”라 말한다. 이 문장은 일본어로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로 번역되었다. 번역 역사상 가장 멋진 오역으로 꼽힌다.

“당신과 술 마신 것 따위는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아!”

동양의 경우, 술잔을 부딪칠 때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개를 숙이지요. 한국의 경우, 술 마실 때 눈맞춤은 오히려 피해야 할 행동입니다. 특히 윗사람과 마실 때는 머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잔을 들이켜야 합니다. 한때 유행했던 한국 사내들의 ‘폭탄주’는 ‘눈맞춤’ 따위와는 아예 상관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 혹은 신뢰와는 거리가 먼 아주 폭력적인 술 문화입니다. 오로지 누가 더 많이 마시고, 더 오래 버티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이튿날 출근하며 부스스한 얼굴로 꼭 그럽니다. “어제 필름이 끊겼어요!” 이 문장의 진정한 뜻은 “당신과 술 마신 것 따위는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아!”입니다. 술을 몇 잔 마셨는지는 기억하지만, 상대방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신과는 소통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의 표현입니다.

폭탄주는 한국 사내들의 소통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요즘은 폭탄주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폭탄주 문화는 서구가 수백 년 동안 이뤄놓은 정치, 경제, 문화의 수준을 압축해 쫓아가다 보니 부작용으로 생긴 현상입니다. 얻는 게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게 있습니다.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지만, 소통하며 해결하는 과정은 상실했습니다. 합의를 통해 미래 발전을 모색하기보다는 그저 앞서나가는 이들을 쫓아가는 것에 집중하던 시대의 산물이지요. 방향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소통하며 미래를 계획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전속력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래서 ‘함께 마시는 것’보다는 빨리 취해서 이 무의미한 모임을 끝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눈맞춤을 무시하는 폭탄주 문화에서 성숙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합니다. ‘7년간의 좋은 섹스’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눈맞춤은 그저 좋은 섹스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사소통 발달에서 건너뛸 수 없는 너무도 중요한 현상입니다.

‘inter-inner principle’

‘터치’와 ‘눈맞춤’은 아기가 경험하는 최초의 상호작용(inter-action)입니다. ‘자아(self)’가 생기기 전에 먼저 상호작용을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inter-inner principle’로 설명합니다. 번역하자면 ‘상호작용-내면화 원리’ 정도가 되겠습니다. 사회적 상호작용이 개인의 내적 과정으로 전환되는 원리입니다. ‘나’보다 ‘우리’가 먼저라는 뜻입니다. 발생학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나’라는 의식은 어떻게 생길까라는 질문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이자, 근대 세계관 자체를 뒤흔드는 주장입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바로 ‘나’라는 의식, 즉 ‘자아’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심리학은 오랫동안 인간의 ‘자아’는 미숙한 형태로 태어나 여러 발달 단계를 거쳐 성숙하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피아제(Jean Piaget, 1896~1980년)의 발달심리학이 대표적입니다. 스위스 심리학자 피아제는 아동의 인지발달 단계를 크게 4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감각운동기(Sensomotorische Phase, 0~2세), 전조작기(Praoperationale Phase, 2~7세), 구체적 조작기(Konkret-operationale Phase, 7~11세), 형식적 조작기(Formal-operationale Phase, 12세 이상). 이렇게 4단계를 거쳐 아동의 인식 능력은 최종적으로 추상적 사고가 가능한 형태로 발달합니다. 여기에는 물론 자아인식 능력도 포함되지요.

피아제에 따르면, 위와 같은 발달 단계를 거치는 인간의 인지 능력은 문화적, 역사적 맥락과는 상관없이 아주 보편적 현상입니다. 이런 주장을 ‘단선론적 발달이론(unilinare Entwicklungstheorie)’이라고 합니다. 역사 발전이란 미개사회로부터 봉건주의,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발전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대표적입니다. 서구 사회가 역사의 중심부에 들어서며 만들어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이런 발전이론의 한계는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에 관해서는 지극히 편협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년)는 이 같은 발전론을 유럽의 역사 발전을 절대화하는 ‘서구중심주의’라고 비판합니다. 피아제의 발달이론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물론 감정의 다양함을 파악하려는 ‘문화심리학’은 피아제 주장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출발합니다. 피아제와 같은 해에 태어난 러시아 심리학자 비고츠키의 발달이론입니다. 84세까지 살았던 피아제와는 달리 불과 38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비고츠키는 인간 발달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적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바로 ‘inter-inner principle’입니다.

‘개체 간(inter-individual) 경험’이 내면화된 결과가 ‘자아’라는 것입니다.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에서 ‘주관성(subjectivity)’이 형성된다는 주장이지요. 반드시 문화적 맥락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상호작용이 내면화된 결과인 주관성, 혹은 자아는 문화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비고츠키의 주장은 문화역사적 맥락과는 상관없는 인지 능력에 대한 피아제류의 심리학 이론을 기초부터 뒤흔들었습니다. 오늘날의 ‘문화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은 바로 비고츠키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소통과는 아무 상관없는 한국의 ‘폭탄주’. 술 마신 다음 날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고백은 ‘당신과 술 마신 것은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아!’라는 뜻이다.
소통과는 아무 상관없는 한국의 ‘폭탄주’. 술 마신 다음 날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고백은 ‘당신과 술 마신 것은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아!’라는 뜻이다.

인간 위대한 이유, ‘미숙아’로 태어나서

아기가 태어나서 경험하는 상호작용의 구체적 내용은 ‘터치’와 ‘눈맞춤’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음 파트에서 설명할 ‘정서 조율(affect-attunement)’과 더불어 자아(self)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상호주관적 경험’입니다. 아기와 엄마 중, 그 누구에게도 환원할 수 없는 ‘공동의 경험’이라는 뜻입니다. 엄마와 아기가 ‘같은 몸’이었던 태아 때 신체적 관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터치는 엄마가 손으로 아기를 만지지만, 아기는 자신의 몸으로 엄마의 손을 접촉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손과 아기 피부가 접촉하는 부위는 엄마의 것도 아니고 아기의 것도 아닙니다. 둘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철학에서 그토록 어렵게 설명하는 ‘상호주관성’의 출발점입니다. 눈맞춤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와 아기가 서로 마주 보는 눈맞춤 상황은 둘 중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엄마와 아기, 두 사람 모두의 것입니다. 이처럼 상호주관적 ‘우리’로부터 독립된 개체인 ‘자아’가 생성됩니다. 독립된 개체가 되었지만, 터치나 눈맞춤 같은 최초의 상호주관적 경험이 있기에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 문명의 기초가 바로 이 발달 초기의 상호주관적 경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만이 ‘의사소통적인 눈맞춤’을 할 수 있습니다. 침팬지, 오랑우탄 등 일부 유인원도 눈맞춤을 할 수 있지만 극히 제한된 형태입니다. 눈맞춤이 확장된 형태인 ‘공동주의(joint-attention)’ 단계에 이르면 그 차이는 더 확연해집니다. 대부분 영장류에서 눈맞춤은 위협 신호일 뿐입니다.

인간만이 진정한 의미의 소통적 눈맞춤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미숙아’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혼자 움직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제 몸을 가눌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독립된 개체’가 되는 겁니다. 다른 동물은 ‘성숙한 개체’로 태어나지만 인간의 아기만 꼼짝도 못하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스스로 일어서서 자유롭게 걷기까지 생후 1년은 족히 걸립니다. 모순적이게도 인간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숙아로 태어나기 때문에 위대한 겁니다. 다른 동물에게서는 볼 수 없는 엄마 품 안에서의 ‘터치’ ‘눈맞춤’과 ‘상호작용적 경험’을 통해 인간 문명의 기초를 습득하기 때문입니다.

강아지가 귀여운 까닭은?

“강아지를 집에 들인다면 집을 나가겠다.”

내가 아들 둘과 함께 강아지를 입양하겠다고 하자 아내가 완강히 반대하며 한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개에 물린 기억이 있는 아내는 강아지 털이 온 집안에 날리는 것도 질색이고, 똥오줌은 누가 치울 거냐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집에 없을 때, 나는 강아지를 몰래 데려왔습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강아지는 바들바들 떨면서 아내와의 첫 만남을 기다렸습니다. 물론 나와 두 아들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아내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강아지는 셔틀랜드 쉽독입니다. 아이들이 입양 전부터 이름을 ‘호두’라고 지었습니다. 이마에 다이아몬드 모양 흰 털이 있고, 목에는 목도리 같은 하얀 털을 둘렀으며, 흰 장화를 신은 듯한 예쁜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강아지입니다. 집에 들어서며 강아지를 처음 본 아내의 화들짝 놀란 표정을 나와 아들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 조심스럽게 살폈습니다. 그러나 그때 아내의 반응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강아지를 보자마자 너무 사랑스럽다는 표정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이후 과정은 더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년 후, 아내는 내 환갑 생일을 기념하며 강아지 한 마리를 더 입양했습니다. 사실 내 환갑은 그저 핑계였습니다. 호두가 늙어가니 동생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지요. 요즘 아내는 아침, 저녁으로 개 두 마리를 끌고 산책하는 재미로 사는 듯합니다.

개에 대한 그 엄청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호두는 어떻게 아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요? 물론 너무도 귀여운 외모가 한몫했습니다. 모든 동물의 새끼는 사랑스럽고, 예쁩니다. 심지어 쥐의 새끼도 귀엽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새끼의 외모는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큰 눈, 작은 코와 입 등의 귀여운 특징’을 가진 인간 아기들이 더 많은 관심과 돌봄을 받고 생존에 유리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귀여운 외모와 더불어 아내의 마음을 첫눈에 사로잡은 우리 호두의 결정적인 능력은 ‘눈맞춤’입니다. 아내는 자신을 바라보는 호두의 크고 검은 눈에 푹 빠졌다고 합니다. 개는 인간과 눈맞춤을 아주 잘합니다. 인간과 오랜 세월 함께 살아서 그렇습니다. 인간과 눈맞춤을 해야 사랑받고, 먹이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인간과의 눈맞춤이 생존에 유리함을 습득한 셈이지요. 그러나 고양이는 주인과 눈맞춤을 그리 즐겨 하지 않습니다. 인간 없어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고양이는 주인이 상위 서열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가 되는 겁니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4호 (2025.04.09~2025.04.1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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