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최고의 공법으로 20세기 최대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2003년 건축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에게 당시 심사위원장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가 보낸 찬사다. 수상자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Sydney Opera House)를 설계한 덴마크 건축가 예른 웃손(Jørn Utzon)이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현대 건축이고, 시드니의 상징이다. 연간 200여만명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건축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2007년 유네스코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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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젊은 건축가와 베넬롱 곶의 곱사등이
오페라 하우스는 시드니 하버 쪽으로 돌출된 베넬롱 곶(Cape)에 자리 잡고 있다. 지형적 특성 때문에 배를 타고 바다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지상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지면보다 높은 계단식 기단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흡사 성전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예른 웃손은 멕시코 여행 중 마야 문명의 웅장한 계단식 피라미드를 보고 감명을 받아 오페라 하우스 기단 디자인에 적용했다고 한다.
오페라 하우스는 곡선의 거대한 지붕이 곧 건물의 외벽을 구성한다. 멀리서 보면 단순히 백색 지붕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흰색과 노란빛이 도는 크림색의 두 가지 도자기 타일로 그려낸 기하학적 패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4253개의 조립식 V형 콘크리트 패널에 100만장 이상 타일을 대각선 패턴으로 붙인 후, 이미 완성된 구조물에 고정하는 방식이 사용됐다. 건축가의 상상력과 이를 구현한 창의적 기술이 놀랍다. 오페라 하우스는 세계적 수준의 공연시설로도 유명하다. 2700여석의 콘서트홀과 1만5000개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 1500석 규모 오페라 공연장 등이 있다. 거의 매일 공연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공연이 없을 때는 내부 투어도 가능하다.
그런데 무려 16년의 공사 기간이 말해주듯 오페라 하우스는 완공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오페라 하우스는 1950년대 그저 그런 항구 도시에 불과했던 시드니를 세련된 문화 도시로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기획됐다. 1956년 국제 공모에 32개국의 233팀이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르 꼬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알바 알토, 미스 반 데 로에 등 당대의 건축 명장들도 있었다. 당시 38세의 젊은 건축가 예른 웃손의 안은 투시도도 없었고 도면이 건립 부지와도 맞지 않는 등 응모 규정에 위반해 1차 심사에서 보기 좋게 탈락했다. 하지만 뒤늦게 심사에 합류한 미국 건축가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이 탈락 안을 살펴보고 웃손 안을 골라내 다른 심사위원을 설득함으로써 예른 웃손은 구사일생으로 기회를 잡았다. 에로 사리넨은 뉴욕 케네디 공항의 트랜스 월드 항공(TWA) 터미널을 설계한 저명한 건축가다.
1958년 예른 웃손은 건축 구조엔지니어인 영국의 오베 아룹(Ove Arup)과 함께 디자인 초안, 일명 ‘레드북(Red Book)’을 발표했고, 곧이어 공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공사는 하염없이 지체되고,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불어났다. 여론이 좋을 리 없었다. 사람들은 건설 부지 베넬롱 곶의 지명을 따서 오페라 하우스를 ‘베넬롱 곶의 곱사등이’라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주 정부는 예른 웃손에게 디자인 결정권 포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제안을 거부했고, 1966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긴 채 쓸쓸히 고향 덴마크로 돌아갔다.
건축 장인들의 포기 없는 도전으로 탄생한 걸작
공사가 계획과 전혀 다른 상황으로 치닫게 된 건 주 정부의 책임이 컸다. 기획 단계부터 비용 부담이 컸던 주 정부는 설계가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공사를 강행했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설계를 완성해나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현장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설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단 공사를 먼저 진행했기 때문에, 다음 단계 공사를 시작할 때 앞서 만든 기단이 구조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재시공하는 등의 일이 반복된 것이다.
오페라 하우스의 아름다운 곡선은 고도의 건축 기술이 요구되는 쉘(Shell) 구조 덕분이다. 디자인 초안을 공개했던 1950년대 중반에도, 실제 공사가 진행된 1960년대에도 이를 쉽게 해결할 만한 건설 기술은 없었다. 디자인 변경 없이 해결책을 찾는 데만 무려 3년이 소요됐다. 여러 크기의 삼각 곡면 패널을 만들고, 이를 좌우 대칭으로 세워 외벽의 곡면을 구성하는 방식인데, 패널을 조립식으로 생산하면 비용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쉘 구조는 2400개의 뼈대 부재와 4000장의 패널 부재를 현장에서 생산하고 조립해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컴퓨터로 구조를 해석하고 축소 모델을 이용해 풍동실험을 하는 등 당대 첨단 과학 기술이 총동원됐다. 이 모든 기술적인 난제 해결에는 구조엔지니어인 오베 아룹의 역할이 컸다.
예른 웃손이 시드니를 떠난 후 호주 출신 피터 홀(Peter Hall) 등 3명의 건축가가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우선 과제는 비용 절감이었지만, 이들은 초기 디자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외부 디자인은 그대로 유지하되 내부 디자인을 변경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줄여나갔다.
1973년 드디어 오페라 하우스가 완공됐다. 계획보다 10년이 늦어졌고, 비용은 무려 15배나 초과됐다. 하지만 오페라 하우스는 시드니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이자 문화 예술의 도시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예른 웃손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한 건으로 일약 세계적인 건축가 반열에 올라섰다. 1985년 호주 정부는 뒤늦게 예른 웃손에게 훈장을 수여했고, 2004년 예른 웃손은 오페라 하우스의 내부 재설계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오페라 하우스를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한 채 2008년 세상을 떠났다.
결과적으로 오페라 하우스는 건설 사업 관리(Project Management)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구조엔지니어인 오베 아룹의 회사는 현재 1만5000여명의 직원을 보유한 세계적인 엔지니어링 회사가 됐다. 규정에도 어긋난 설계안을 선택한 좋은 건축을 알아보는 안목, 그리고 완공하기까지 포기하지 않은 건축 관련자들의 의지가 역사에 기록될 세계문화유산을 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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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89호·송년호 (2022.12.21~2022.12.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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