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4.22 21:00:00
디폴트옵션 활용 못하는 한국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는 방안으로 도입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을 둘러싼 비판이 거세다.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별도의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 사전에 기본 투자 상품을 정해두는 제도다. 가입자가 적극적으로 운용 지시를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자산을 운용해준다는 게 핵심이다.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자산 운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낮은 수익률을 기록한다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2022년 본격 도입했다. 그러나 도입 3년 차인 현재, 디폴트옵션 효과는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확한 안내가 없어 ‘디폴트옵션’을 제대로 활용하는 투자자가 거의 없는 탓이다. 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디폴트옵션을 활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대부분 원리금 보장 상품
쥐꼬리 수익률에 취지 무색
디폴트옵션은 개인이 운용 책임을 지는 확정기여(DC)형·개인형 퇴직연금(IRP)에 적용한다. 디폴트옵션을 적용하면 가입자는 초저위험,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 등 총 4가지 상품군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스스로 퇴직금을 굴릴 수 있다는 기대 덕분에 투자자가 몰렸다.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을 택한 가입자는 2024년 4분기 말 기준 631만명으로 2023년 말(479만명)보다 32% 증가했다. 가입자 수가 늘면서 잔액은 40조670억원으로 1년 사이 219% 급증했다.
언뜻 보면 개인의 투자 성향에 맞춰 적절히 투자를 잘 유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가 나타난다. 일부 상품에만 가입자가 쏠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 제도 시행 이후 가입자 10명 중 8명이 초저위험 상품인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선택했다. 원리금 보장형 상품은 원리금을 보장해주는 대신, 매우 낮은 수익만 기록하는 상품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디폴트옵션으로 운용된 자금의 약 85%가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택했다. 실적 배당형 상품 등 수익성이 높은 상품으로의 유입은 약 15%에 그쳤다.
가입자 대다수가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가입한 탓에 수익률 개선 효과는 제한적이다. 디폴트옵션을 적용한 퇴직연금의 1년 평균 수익률은 지난해 말 기준 약 9.8%였다. 같은 기간 1년짜리 정기예금에 묻어뒀을 때 손에 쥘 이자(금리 연 3.18%)보다 높다. 하지만 가입자의 85%(533만명)가 쏠린 ‘초저위험 등급’ 상품 수익률은 연 3.3%에 불과하다. 10명 중 8명 이상은 디폴트옵션 시행 이후에도 정기예금 같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다. 처음 정부가 기대한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 효과는 아예 나타나지 않은 셈이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 수익률이 저조한 원인으로 제도 설계상 문제를 지적한다. 무엇보다 디폴트옵션에 원리금 보장형 상품이 포함돼 있는 게 가장 큰 실책이다. 항상 리스크를 염두에 두는 전문 투자자와 달리 투자 경험이 부족한 일반 소비자들은 수익률보다는 안정성을 중시한다. 당연히 원리금을 보장하는 상품의 선호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디폴트 옵션에 원리금 보장형을 넣은 곳은 한국과 일본뿐이다. 정부가 벤치마킹했던 미국과 영국, 호주 등 선진국은 실적배당형 상품만 포함했다.
가입자(근로자)에게 상품 선택을 맡기는 방식도 수익률이 저조한 요인이다. 자칫 투자형 상품을 택했다가 원금 손실이 날 수 있다는 불안에 원리금 보장형을 택할 확률이 높아서다. 미국에선 회사가 투자전문가의 자문을 받은 뒤, 디폴트옵션을 근로자에게 제안한다. 근로자가 거부하지 않는 한 회사 제안대로 자동 가입된다.
이름 바꿨지만 ‘땜질 우려’
결국엔 제도 본질 개선해야
저조한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정부당국도 대책 마련에 한창이다.
우선 디폴트옵션 수익률 평가 지표를 신설한다.
고용노동부와 운용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퇴직연금 사업자 평가 지표를 통폐합하면서 디폴트옵션 평가 항목을 신설하기로 했다. 핵심 평가 지표인 적립금 운용에 할당된 50점 중 5점을 디폴트옵션 항목에 배정할 계획이다. 원리금 보장 수익률 배점은 14점에서 10점으로, 원리금 비보장 수익률은 21점에서 20점으로 낮아진다.
4월부터는 일부 상품의 명칭을 바꿨다. 디폴트옵션 상품 명칭에서 위험도 표기가 안정형(초저위험), 안정투자형(저위험), 중립투자형(중위험), 적극투자형(고위험)으로 변경됐다. ‘위험’이란 용어 때문에 투자를 꺼리는 소비자를 유인하려는 조치다.
다만, 금융 업계는 이 같은 조치가 ‘임시 땜빵’에 불과하다고 내다본다. 근본적인 문제를 손보지 않으면 투자자 저수익 상품 편중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디폴트옵션 상품 이전 허용이다. 지금은 디폴트옵션 상품 실물 이전이 막혀 있다. 가입자가 상품을 바꾸기 위해 계좌를 타사로 옮기려면, 기존 계좌를 청산한 후 현금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초저위험 상품 가입자가 다른 중위험 상품으로 갈아탈 준비를 한다고 치자. 복잡한 해지 절차를 거친 뒤, 다시 가입하는 번거로움을 거쳐야 한다. 또 이 과정에서 1%에 불과한 해지 이율만 받는다. 굳이 갈아탈 요인이 없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디폴트옵션 상품 이전을 허용해야 한다. 만약 이 방법이 어렵다면 디폴트옵션 이전에 한해서만 특별 해지 이율을 적용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강조했다.
상품 구성과 가입 방식을 손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상품 중에서 원리금 보장형을 빼라는 목소리도 크다. 원리금 보장형으로 자금이 몰리는 탓에 투자자들이 실적배당형 같은 고수익 상품에 투자를 꺼린다. 아예 선택지에서 빼 자연스럽게 중립투자, 적극투자형 상품으로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가입자가 직접 상품을 선정하는 방식도 교체해야 한다. 원금 손실을 두려워하는 개인 투자자 특성상, 직접 가입 방식을 정하면 저수익 상품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방식을 놔두면 수익률 제고라는 원래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다. 미국 등 금융 선진국처럼 전문가가 선정한 상품을 자동으로 운용하는 방식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캠페인과 교육을 통해 디폴트옵션에 대해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퇴직연금 가입자 중 디폴트옵션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 도입 취지를 잘 아는 가입자는 드물다. 금융사가 가입을 권유해 선택할 뿐이다. 대다수 투자자가 제도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현재 상태로는 그 어떤 좋은 상품이라도 투자자를 모으기 힘들다.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 상황 속에서 대다수 투자자는 원금을 보장하는 상품을 선택한다. 증권가 관계자는 “제대로 설명이 안 된 상황 속에서 전환을 유도하다 보니, 초저위험 상품으로 투자자가 몰렸다. 디폴트옵션 개념과 상품별 특징을 알리고 교육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투자자들이 헛되이 투자하지 않도록 정부당국이 세심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반진욱 기자 ban.jinuk@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6호 (2025.04.23~2025.04.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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