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출시된 병우유, 3월부로 판매 종료.”
최근 일본에서 유리병에 든 우유 제품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이 한동안 화젯거리가 됐습니다. 센토(錢湯·일본의 대중목욕탕)에서 병우유 한잔은 목욕 후 거쳐야 하는 필수코스이자 통과의례로 그들의 목욕 문화를 상징하는 일부처럼 인식돼 왔기 때문입니다.
업체들은 빈병 회수 및 운송에 드는 일손 부담 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설명했으나, 일본인들 사이에선 유감이라는 반응이 잇따랐습니다. 한 시민은 “목욕하고 나서 병우유 한 병 마시는 게 낙이었는데, 종이팩으로 나오면 굳이 안 마실 것”이라며 “병 특유의 감성도 사라지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목욕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 짓는 게 일상인 일본은 가히 ‘목욕의 나라’라고 할 만큼 목욕에 진심입니다. 때문에 그만큼 목욕과 관련된 흥미로운 소재들도 많습니다.
![병우유 제품 판매 종료 소식을 알리는 일본 뉴스. [유튜브 캡처]](https://wimg.mk.co.kr/news/cms/202504/02/news-p.v1.20250330.a4c6fd0d3bf948c5aad0ce4cbe9ecb2f_P1.jpg)
한국 등 외부인들 눈에 상당히 독특하고 이색적으로 비치는 ‘혼욕’(混浴)도 그중 하나 입니다.
최근에는 많이 자취를 감췄다지만, 온천이나 동네에 있는 대중 목욕탕에 가보면 남녀가 함께 목욕하던 시대의 흔적들을 아직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남탕과 여탕 사이에 위치해 양쪽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든 독특한 구조의 감시대인 번대(番台), 여탕 드나들듯 남탕을 들락거리는 젊은 여성 종업원의 모습 등이 단적인 예 입니다. 처음 일본의 대중 목욕탕을 접한 외국인들이 맞닥뜨렸을때 적잖이 당황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일본은 에도시대(1603년~1868년)까지는 남녀가 나체로 함께 목욕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에도 최초의 대중목욕탕은 1591년 현재 일본은행이 있는 곳 인근에 설립됐는데, 100만명이 넘는 인구가 밀집한 데다 독신 남성이 특히 많이 거주했던 에도는 먼지가 발생하기 쉬워 대중목욕탕이 퍼지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특히 도쿠가와 막부가 시행한 ‘참근교대’는 각 지방 다이묘들로 하여금 매년 에도와 자신의 영지를 번갈아 오가게 했고, 이 과정에서 숙박 및 휴식을 위한 목욕시설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810년 무렵 에도에는 500개가 훌쩍 넘는 대중목욕탕이 생겨났습니다. 물론 대부분이 남녀가 공동 이용하는 혼탕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흑선을 이끌고 일본을 강제 개항 시킨 미국의 페리 제독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나체도 개의치 않고 남녀가 혼욕하는 광경은 이들의 도덕성에 대해 미국인들이 긍정적 인상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일본 서민들은 다른 대부분의 동양 국가보다 도의적으로 뛰어남에도 의심할 바 없이 음란한 국민이다.”-The Perry Expedition(페리 제독 일본 원정기)

역시 같은 시기 일본에 처음 사절단을 이끌고 체류했던 스위스 정치가이자 상인이었던 에메 훔베르트는 다음과 같이 일본을 묘사했습니다.
“주인은 오는 손님을 거절 않고 같은 욕조에 남녀 가리지 않고 넣는다. 입욕객이 남자든 여자든 나체로 걷는다고 해도 일본 관습으론 당연한 것이다. 새우처럼 발갛게 익은 아름다운 피부색을 드러낸 채 집에 돌아가겠다며 나체로 걸어가도 아무런 장애가 없다.”-Le Japon illustre (막부말기 그림으로 본 일본)
즉, 당시 일본인들은 남녀 불문 알몸 드러내기를 개의치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역시 벗은 채로 다수의 남녀가 어울리다 보면 쉽게 풍기문란이 발생했는지 막부는 1791년을 시작으로 수차례 혼욕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잘 지켜지지 않는 유명무실한 조치에 불과했습니다.

국토가 대부분 화산섬인 일본은 특유의 기후와 풍토로 온천이 매우 풍부했고, 이 점이 다수가 함께 목욕하는 문화가 발달한 기반이 된 것으로 흔히 거론됩니다.
이와 함께 남녀 혼욕이 별 거부감 없이 수용됐던 배경으로 불교에서 유래한 ‘시욕(施浴)’의 전통이 자리하고 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시욕이란 병들거나 가난한 이들에게 목욕할 기회를 주는 자비 행위로, 더러움을 씻음으로써 육체적 고통을 덜고 공덕을 쌓는다는 불교적 실천이었습니다.
불교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6세기 후반 이후, 일본의 사찰에서는 대중들에게 무료로 목욕을 제공하는 시욕활동이 널리 확산됐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성별 구분보다 청결과 구제라는 목적이 우선시 됐습니다. 이러한 시욕 문화가 이후 도시화와 함께 대중목욕탕의 기원으로 이어졌고, 남녀 혼욕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풍토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던 일본도 개항이후 서구문물이 대규모로 유입됐고,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1870년대부터 혼욕을 미개하고 부도덕한 행위로 규정하고 본격 단속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20세기 중반무렵에는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남녀 구분식 대중목욕탕이 완전히 정착됐고, 혼욕도 거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일본에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혼욕 금지법’은 없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지자체가 저마다 공중 목욕 시설에서 혼욕을 제한하는 조례를 두고 있습니다. 또 법적 구속력이 있는건 아니지만 후생노동성이 “대략 7세 이상의 남녀는 혼욕하지 않는다”라는 지침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시골 지역 예컨대 군마, 나가노, 오이타, 아키타 등지에서는 혼욕 온천이 남아있지만 보통 수건 착용 등이 의무거나 여성 이용자를 위한 시간대를 따로 두고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말 그대로 생판 모르는 남녀가 나체로 입장하게 되는 혼욕탕도 존재는 하나, 주로 관광 자원으로서의 의미로 명맥만 유지 중입니다.

에도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대중목욕탕에는 ‘유나(湯女)’라고 불리는 여성 목욕관리원들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혼욕이 일반적이었던 만큼 이들은 당연히 남녀 구분없이 손님의 등을 밀고 몸과 머리를 씻기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이 있는 목욕탕은 큰 인기를 끌었는데,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다며 선망받는 소위 스타급 유나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유나가 했던 머리 모양은 ‘가츠야마마게’(勝山髷)라고 불리며 당시 일반 여성들 사이에서도 유행했고, 이후 기혼 여성들이 했던 머리모양인 ‘마루마게’(丸髷)의 원형이 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유나들의 인기가 지나치게 높아지고 점차 남성 손님을 단순히 씻겨주기만 하는 데서 그치치 않고 성까지 팔기 시작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막부는 1657년 이들의 목욕탕 영업을 금지하고 에도시대 최대 홍등가였던 ‘요시와라’ 유곽으로 전부 보내버렸습니다. 이후 이들 유나들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생겨난 이들이 바로 ‘산스케’(三助)라는 남성 목욕관리원들이었습니다.

산스케들의 주업무는 유나들의 활동이 금지된 에도시대 중기이후 대중 목욕탕에서 손님의 등을 밀어주는 일인 나가시(流し)였습니다. 1915년 도쿄에만 약 300명의 산스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제대로된 산스케로 인정받기 위해선 거의 10년의 경력을 쌓아야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성별 구분없이 손님을 받았고, 남녀 탕 구분이 생긴 후에는 여탕에 들어가 나가시를 제공했습니다. 산스케 본인은 물론 여탕에 있는 손님들은 산스케가 있다는 사실에 별다른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산스케들은 기본급 외에 나가시 횟수에 따라 성과급을 받았는데, 목욕탕 직원들중에서 보통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리는 편이었습니다. 은퇴 후에는 모은 자금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욕탕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50~60년대까지 활발하던 산스케들에 대한 수요는, 그러나 이후 보일러와 가정내 욕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줄기 시작했고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2010년대까지는 도쿄 시타마치(서민 거주지)등에 극소수의 산스케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용객들에 따르면 15분에 400엔(약 3900원)정도의 요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70대까지 활동하다 지난 2013년 은퇴한 산스케 A씨는 당시 일본 언론에 “손님 비율은 남녀 5:1 정도였다. 젊은 여성들도 있었는데 최근에는 한 여대생이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나가시 서비스를 받으러 오기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손님들의 몸을 씻겨왔기 때문에, 성별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한때 일본 전역에 2만곳에 육박하던 대중목욕탕은 이제 2000곳 미만까지 줄어들며 전성기 대비 90%가까이 급감한 상태입니다. 주요인은 역시 경영자의 고령화와 이용객 감소 및 레저형 대체 목욕시설의 대두 등에 따른 수익성 악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대중 목욕탕의 쇠락은 단순히 산업 침체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혼욕, 산스케 등 전통 목욕관리사, 그리고 소소하게는 목욕후 마시던 병우유까지 그들의 독특한 문화적 요소들도 함께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대중 목욕탕의 과거와 현재는 그들의 벗은 몸에 대한 인식을 비롯해 시대에 따른 사회상의 변화를 투영해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이대로 사라져갈지 또 다른 형태로 존속해 갈지 확실히 알 순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건 대중목욕탕이 일본이란 사회를 아는 데 있어 상당히 유용한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2022년 이후 3년 넘게 방일 외국인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수많은 한국인들이 연일 일본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오랫동안 일본인들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온 대중목욕탕에 가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관광객들을 위해 조성된 온천 관광지도 좋지만 그들의 문화와 정서를 더 날것으로 체감할 수 있는 대중목욕탕에 한번 쯤 가보는건 어떨까요. ‘가깝지만 먼나라’인 일본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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